2012년 12월 31일 월요일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히11:1)

선진들이 비가시적 존재의 증거를 확보한 방식은 믿음이다. 뒤집어서 생각하면 믿음이 없었다면 보이는 것에 근거해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기동하며 살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의 선진들은 그런 가시적인 것을 생의 기준과 동력으로 삼지 않았다는 게 히브리서 기자의 주장이다. 믿음의 정의가 등장하는 로마서의 문맥은, 믿음의 사람이 된 이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겪고 있다는 현실과 가해자에 해당하는 원수들을 갚는 권한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의인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으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해법이 언급된 이후에 믿음의 본질이 진술된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과 관계한다. 당연히 믿음이 제거되면 비가시적 존재가 모두 제거된다. 가장 먼저 제거되는 대상은 하나님 자신이다. 로마서식 표현을 빌리자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신성과 영원한 능력이 일순위로 제거된다.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를 이어주는 소통의 유일한 끈이 믿음이기 때문이다. 눈의 기능이 극도로 과장한 비주얼 시대가 기독교적 관점으로 볼 때 노리는 표적은 비가시적 존재의 소멸 내지는 망각이다. 그 방법은 믿음을 제거하는 것이다. 무형의 '비가시적' 신비주의 소재를 다루는 영화나 드라마도 인간의 상상으로 유형화될 가시화 가능성이 없으면 취급하지 않는다. 빛으로도 표상하지 말아야 할 하나님은 '인간화된 신'으로 대체하면 몰라도 그분 자체로는 문화적 활동에 컨텐츠로 담겨지실 대상이 아니시다.

난감하다. 하지만 주님께는 불가능이 없다. 원하시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 그런데도 복음이 증거되는 하나님의 방식은 전능을 투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처럼 연약한 증인을 세우시는 거다. 결국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가장 고급한 가시화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 자신이다. 그 안에서 신적 형상의 본체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사신다면 그보다 더 탁월하고 선호되는 기독교 비주얼은 없다. 믿음의 사람들이 이 땅에 살아가는 대사회적 신분은 세상이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인이다. 믿음은 주께서 주시는 선물이고 우리는 그것의 증인이다. 믿음의 증인은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마음과 생각과 언어와 행실에서 범사에 인정하는 사람이다.

반대로, 믿음이 빠지면 독자는 성경의 전부를 상실한다. 수천년 전의 낡고 거북한 사유가 유령처럼 책갈피를 배회하는 쾌쾌한 고서일 뿐이다. 인간문맥 안에서 합의된 윤리의 쪼가리 소스로 여기는 자들의 가식적인 지문이 드물게 찍히는 정도다. 사단이 성도의 본질적인 것을 은밀히 빼돌릴 때에는 언제나 인간에게 가시적 작용이 극대화된 가장 매혹적인 미끼가 사용된다. 윤리적 행실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물론 Better than nothing이다. 그러나 믿음으로 성경과 세상을 읽지 않으면 아무것도 읽지도 보지도 못한거다. 팩트의 유무에 최종적인 가치를 거는 게 그나마 괜찮은 접근으로 환영된다. 가시성 넘어의 비가시적 본질로는 도약하질 못한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다. 증거가 희미하면 주저하고 망설인다. 나 자신의 삶을 잠시만 살펴봐도 그런 망설임이 무더기로 적발된다. 보이지 않으시는 주님과의 연합을 제공하는 최고의 선물을 가졌어도 누리지를 못한다. 의인이 믿음으로 산다는 건 억울함과 희생과 고난을 뒤집어 쓰는 가시밭길 삶이 아니라 그 자체로 축복이요 기적이다. 히브리서 11장에 열거된 허다한 믿음의 선배들이 믿음의 삶을 고집했던 것은 주님과의 연합이란 그 축복과 기적에 버금가는 어떠한 것도 세상에서 발견하지 못해서다. 그런 삶이 영원한 증거로 성경에 기록된 것은 우리의 삶을 안내하는 이정표기 때문이다. 아무나 지각하지 못한다. 믿음이 인식의 눈이다. 오직 믿음으로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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