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20일 목요일

배부를 것이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이라 (마5:6)

팔복은 땅에서 사는 하나님의 백성이 천국을 디디며 살아가는 삶의 구체적인 지침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누군지에 대한 정체성의 지표과 살아가는 삶의 원리로서 구약에는 십계명이 있고 신약에는 팔복이 있다. 주어도 동일하고 본질도 동일하고 목적도 동일하나 양태와 깊이와 명료성에 있어서는 차이를 보인다. 팔복은 십계명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이다. '율법에는 이렇게 쓰여 있으나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율법의 본의가 팔복이란 예기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은 외적 행위이기 이전에 내적 상태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되다는 것은 도덕적 행실을 촉구하는 미끼가 아니다. 물론 행실이 불량해도 된다는 말은 더더욱 아니지만 말이다. 하나를 강조하면 다른 하나를 무시하는 것처럼 여기는 배제적 사고가 보다 깊은 진리로의 초청에 불응해도 되는 암초가 되어서는 안되겠다. 행위는 당연한 열매다. 이에 대해서는 어떠한 폄하도 반론도 부당하다. 그렇다고 행위에 머물면 함정에 빠지고 만다. 강조점은 진정한 복의 유무가 의의 외적인 한시적 구현 여부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배부를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이다. 사람의 상식과 논리를 따라 의미의 사족을 달아서는 안된다. 예수님이 주어라는 사실은 한 순간도 잊어서는 안되는 성경 해석학의 원리이다. 예수님이 만물을 조성하고 역사를 성취하실 분으로서 하신 말씀이다. '배부를 것이라'는 말은 사람이 원하는 내용이 사람의 방식대로 사람의 때에 이루어질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주의 마음에 품으신 의가 주님의 방식대로 주님의 때에 주께서 친히 이루실 것이기에 배부를 것이고 복되다고 말씀하신 주님의 약속이다.

의는 하나님께 있다. 의의 성취도 하나님의 성취이다. 그래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실패함이 없이 배부르게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에게 요청하는 것은 사람의 의에 주리거나 목마르지 않고 주께서 원하시는 의에 주리고 목말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 핀트가 안맞으면 결코 배부를 수 없는 것에 허기진 사람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겠다. 허탄한 것에 슬퍼하고 좌절하고 낙담하며 아파하지 않도록 해야겠다. 마땅히 목말라야 할 그것에 목마르고 마땅히 주려야 할 그것에 굶주려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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