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21일 금요일

대강절의 추억 (펌글, 차정식 교수)

매년 이맘때가 되면 시카고에서 보낸 그 혹독한 겨울이 생각난다.

 1988년 12월, 나는 이른바 ‘사회생활’의 호된 통과절차를 메코믹신학대학원에서 잘못 만난 한 교수와의 얼킨 인연을 통해 겪고 있었다. 그는 개혁신학 전공의 백인 씨니어 교수였고, 내 눈에 인종차별주의 내지 성차별주의의 습성을 지닌 사람으로 보였다. 권위적이고 거창한 어투에 과장된 몸짓을 섞어 강의하곤 했던 그는 유독 백인 여학생들을 편애했다. 백인 여학생이 1등급 학생이었고 백인 남학생이 2등급 학생이었다면, 나와 같은 유색인종은 3등급 학생으로 느껴져 그의 수업시간에는 늘 자괴감과 낭패감이 가시질 않았다.

 그는 용기를 내어 힘들게 질문하는 나와 같은 부족한 아시아출신 학생에게 내 질문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깨닫게 해줘야 할 사명이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자주 무시당했고, 불평등한 처사가 너무 노골적이었다. 하루는 빌레몬서의 시시콜콜한 역사적 정황 따위를 재구성하느라 시간을 보내는 성서주석가들의 연구 작업을 시시껄렁한 것으로 은근히 조롱하면서 그는 이런 사소한 전공의 사소한 분야와 구별되는 자신의 칼뱅 신학에 대한 터무니없는 자긍심을 내비치기도 하였다. 어느 날 ‘연구세미나’ 수업 시간에 나는 그와 결정적으로 부대꼈다. 내 연구 프로포즐을 발표하는데, 그는 다 듣기도 전에 끼어들어 내 발표를 중단시켰고 무시하는 발언을 하였다. 나는 감정이 격해져 발끈했는데, 내 항의의 사유인즉 다른 백인 학생들 발표는 친절하게 다 듣고 상냥하게 조언하면서 왜 유독 내 발표는 이렇게 묵사발로 뭉개느냐는 것이었다. 이 무례함과 불평등의 신학적 기원이 어디 있는 것이냐는 식으로 나는 따지며 대들었다. 내 발언은 그 자리에 앉은 학생들 앞에서 이 교수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망신을 주기에 충분했고, 아니나 다를까, 그는 갑자기 얼굴이 벌개지면서 자신의 권위에 도전한 행태에 대한 분노와 치욕을 얼굴 표정으로 드러냈다. 

나는 이 사건을 정치적 맥락으로 끌어들여 우리 신학대학원에 목사로서 저런 인종차별주의자가 학자로 행세하고 있다는 것은 수치라고 선언하며 일부 교수들을 찾아가 이런 사람을 학교에서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그의 괴팍함을 다 알고 있었고 내 주장에 동정해주었지만, 종신직을 받은 씨니어 교수를 쫓아내는 것은 법적인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그동안 그가 자기 자식과도 불화하고 다른 동료들과도 불편한 관계를 유지해왔다는 사실을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알게 되었다. 그렇지만 법적인 계약관계의 효력으로 그가 은퇴할 때만 기다린다는 식의 답변을 전해 들었다. 결국 이 어쭙잖은 투쟁으로 인해 나는 이 과목에서 D+라는 매우 치욕적인 점수를 받았고 인간에 대한 환멸로 정신이 심히 병들어갔다.

심신이 피폐해진 상태에서 어느 날 스스로 위로받기 위해 저녁 무렵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집을 읽던 중 침대에서 컬러사진보다 더 생생한 형상의 마귀를 보고 즉각 졸도해버리는 끔찍한 환상 체험을 겪기도 했다. 내 뇌 속의 신경세포에 타격을 줄 정도의 충격적인 해프닝이었다. 이후 이 경험에 대한 숱한 고뇌와 분석이 이어졌다. 마침내 나름의 소박한 과학적인 연구를 통해 나는 내 안의 억압된 욕망과 분노가 응어리져 있다가 릴케의 시로 의식의 족쇄가 안온하게 풀어지는 순간 바깥으로 투사된 이미지의 결정체가 그렇게 흉측한 마귀의 몰골로 보인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여기까지가 고통과 좌절의 스토리였다.

어느 날 망연한 포즈로 그간의 황망한 심사를 달랠 길 없어 사우스 55가의 거리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는데 길 건너편에서 사과를 우적우적 씹어대면서 덩치 큰 백인 할아버지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평생을 도시산업선교회에 몸 바치다 당시 메코믹신학대학원 총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데이빗 래미지(David Ramage) 박사였다. 길을 걸으면서 아침식사로 사과를 우적우적 씹어대는 것도 코믹한 풍경이었지만 나를 발견한 순간 그의 그 풍부한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는 내 이름을 불렀고, 호기심을 잔뜩 머금은 표정에 금속성 목소리로 쌕쌕거리며 왜 여기서 어슬렁거리느냐, 왜 그처럼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내가 힘들게 그동안의 사태를 떠듬거리며 이야기하자 그는 사태가 심상치 않은 것임을 알아채고 나를 자기 자동차 안으로 초대했다. 똥차보다 약간 더 나은 그의 조그만 자동차에 총장인 그의 거구가 들어앉는 그 부조화와 불균형도 코믹했다.

차 안에서 이야기를 조금 더 자세히 그에게 들려주는 동안 그는 그 동네를 빙빙 돌면서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러던 중 내게 전한 그의 한 마디는 ‘대강절은 희망을 키우는 절기’라는 말이었다. 그 희망과 관련하여 그가 어떤 디테일로 이야기를 이어갔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 한 마디 선언에서 희망의 육체를 어렴풋이 보았던 것 같다. 전통적인 절기가 형식 이상의 심오한 의미로 채워져 있다는 직관도 스쳤다. 무엇보다 어릿광대 같은 동양인 학생의 푸념을 들어주기 위해 자기 차로 날 초대하여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라”는 예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실천하는 모습에 적잖이 감동이 되었다. 나는 그에게 억지로 동행을 요구한 것이 아니었는데도 그는 자발적으로 동행이 되어주었던 것이다.

대선이 끝난 지 이틀이 지난 현재, 많은 이들이 ‘멘붕’을 말한다. 페이스북의 한 친구는 내 책 <예수 한국사회에 답하다>의 18장 제목이 “예수, 여성을 동무 삼다”였는데, 이것이 바로 18대 대통령으로 여성의 당선을 사주한 다빈치 코드류의 음모론적 복선이 아니었는지 유머러스하게 나를 추궁했다. 또 어떤 이는 기발한 사후승인적 위안의 방식으로 박정희가 5.16쿠데타를 일으킨 지 51.6년이 지난 시점에 그의 딸이 51.6%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 뭔가 신묘한 하늘의 조화가 아닌가 하는 식의 결정론적 암시를 남겼다. 또 다른 이는 오늘 2012년 12월 21일이 고대 마야력의 예언에 따라 마지막 종말의 날임을 상기시키면서 종말의 도래를 강렬하게 희구하는 듯한 여운을 풍겼다.

무엇보다 가슴 아픈 것은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의 대표 송인수 선생의 페이스북 글이었다. 그가 어제 전주에서 열린 학부모 초청 강연회에 갔는데 한 사람도 오지 않았다는 얘기였다. 그 이유에 관해서 그는 전통적인 야도(野都)인 곳에서 이번 대선이 가져온 거의 공황상태의 정신적인 충격이 아니겠느냐고 진단했다.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나는 전라도 출신의 사람이 아니지만 선거 때마다 전라도의 인구가 경상도보다 적은 것이 무슨 원죄인 것처럼 드러나는 꼴을 봐주기가 역겹다. 무슨 사명감처럼 편을 갈라 쪽수로 밀어붙이는 것보다 더 원시적인 야수성이 어디 있으랴.

문득 박정희의 경제치적 덕분에 우리 백성들이 고기를 먹게 되었다는 소설가 김훈의 객기어린 방담에 자신은 제 손으로 열심히 노동하여 당당히 고기를 사먹는다고 퉁명스런 일격을 가한 진중권의 발언이 떠오른다. 전체와 개인, 우상과 주체, 중앙과 주변의 거리가 이다지도 아득하다. 이 세상 구석구석을 두루 헤매며 살피고 부대끼고 체험한 뒤 자신의 몸뚱이로 돌아와 속속들이 그 심연을 다시 살펴도 여전히 방황하는 마음 가눌 길 없고 그 미궁 같은 속내를 다 까발려 보여줄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그런데 하물며 수천 만 명 붉은 도장의 향방에 담긴 ‘표심’을 어떻게 요약하고 한 무더기로 재단할 수 있겠는가.

그저 그런 사연과 의지와 변덕과 미망 속에 아무도 모를 요물 같은 ‘우리’가 불현듯 만들어낸 해괴한 작품 아니더냐. 이런저런 후유증의 사연들을 가슴에 새기면서 샤워를 하는데 문득 24년 전 시카고 남부 55가의 추운 겨울 거리에서 만난 데이빗 래미지 총장의 한 마디가 귓전을 스쳤다. 희망을 키우는 대강절의 의미가 다시 가물가물한 기억의 단층을 뚫고 오늘의 육체를 입으며 돌올했던 것. 이제 대강절의 끝자락에 성탄절이 고개를 내민다. 종말론적 희망이 힘들게 영글어 이 땅에 핏덩이 생명으로 오신 메시아를 기린다면 이 희망으로 선사할 구원은 아직 요원한 미래를 가로질러 절박한 현재에 걸쳐진 것이니 오늘도 폼나게 요동치는 것이 마땅하리라.

오늘도 생명이 태어나는 건 하나님이 아직 이 땅에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단 확실한 증거 아닌가. 무덤 속에 누운 데이빗 래미지 총장이 관 뚜껑을 열고 벌떡 일어나 다시 태초의 언어처럼 ‘희망’을 선포할 분위기다. 이 고리타분한 추상명사가 다시 시간의 씨줄과 공간의 날줄을 엮어가면서 보여줄 이 땅의 풍경과 거기 잇닿아 하염없이 펼쳐질 생의 미로, 그 무늬가 설핏 궁금해질 뿐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

댓글 남겨 주셔서 감사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