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30일 일요일

한병수의 독서법

1. 독서와 사색과 언술의 시간적인 비율은 50: 40: 10이 적당하다. 독서의 Input이 많아야 하고 그것을 소화하는 사색도 그에 비등해야 하나 언술의 Output은 십일조면 족해서다. 문자적 독서와 관념적 사색의 간접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몸으로 참여하는 삶의 독서와 고통으로 읽어내는 사색의 직접성이 수반되지 않으면 안된다.

2. 일간지, 주간지, 월간지, 단행본, 고전을 균형있게 읽는다. 일간지 즉 신문은 매일 터지는 일들의 실태를 파악하는 순발력을 길러주고, 주간지는 사태와 약간의 거리를 두되 여전히 현장감 있는 관점을 제공하고, 월간지는 가까운 원인들이 뒤엉긴 인과의 그물망을 그려주고, 단행본은 단일한 주제나 사태의 심도있는 분석과 규모있는 이해를 제공하고, 고전은 긴 세월동안 축적된 검증의 역사가 누구도 자유롭지 못한 시대의 정신까지 극복하게 돕는다.

3. 최대한의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눈과 귀를 왜곡하고 병들게 만드는 편협한 문헌들을 분별해야 한다. 피하는 게 능사는 아니고 다양한 입장과 관점으로 조명된 매체들을 균형있게 읽는 게 필요하다. 좌우매체 10개씩 읽는다...물론 그렇게 한다 할지라도 극우와 극좌의 중간지점 혹은 평균치가 사실 자체에 도달하는 객관적 중도를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나름 '합리적 중도'라는 표현은 가능할지 모르겠다.

4. 성경만이 진리의 유일한 샘이라는 원리는 독서와 공부의 알파와 오메가다. 성경적 관점은 마치 지구가 스스로를 관조하지 못하여 객관적인 시야 확보를 위해 눈을 지구 밖으로 쏘아올린 인공위성 같다. 왜곡과 오류와 편협의 본성적인 한계는 물론이고 지구와 우주의 피조물적 한계까지 극복하는 객관적 거리를 확보해 준다. 모든 생각과 판단과 평가와 희노와 애락과 행실과 선택이 전적으로 안심해도 좋을 기준을 제공한다.

5. 당연히 아무리 탁월하고 기발하고 독창적인 깨달음도 성경이 그은 진리의 경계선 밖이라면 과감하게 삭제하고 인간의 상식과 합리와 지각에 호응하는 접족의 여지가 없도록 먼 진리라 할지라도 '믿음으로 안다'는 경건한 비약을 단행하는 자세가 독서와 공부의 겸손이다.

6. 독서가 넓지 못하면 거짓과 속임수를 분별하지 못하고 사유가 깊지 못하면 타인이 생산한 생각에 이끌리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비록 육체가 결박되는 방식은 아니라 할지라도 노예처럼 살아가는 것이 불가피한 수순이다. 가장 자유롭다 하면서도 결국 타인의 지적 배설물을 편들면서 살아가는 인생 말이다.

7. 그러나 진리는 우리를 자유케 한다. 어떠한 속박도 불허한다. 이미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셨는데 그 자유가 교묘한 방식으로 유린되고 착취되는 건 기독교의 정신에 위배된다. 타인의 사유를 지배하고 조작하는 건 인간의 존엄한 자유를 유린하는 가장 은밀하고 간사한 방식이다. 마치 내가 주체인 것처럼 느끼는 중에 자발적인 방식으로 노예의 늪으로 빠져들게 만들기 때문이다.

8. 독서와 공부는 진리가 이미 제공했고 지금도 수혈하고 있는 자유를 수호하고 보존하고 공유하고 퍼뜨리는 몸부림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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