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3일 월요일

하나님을 영원토록 향유하라

여호와는 내 기쁨의 원천이라 (시104:34)

다른 모든 조항들이 이것에 좌우되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항은 Man’s chief end is to glorify God, and to enjoy him forever다. 하나님 향유하는 것을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진술한 교리문답 및 고백서는 이전에 없었다. 1560년 개정판 제네바 교리문답 1문항은 인생의 제일가는 목적이 창조자 하나님을 아는 것(nouerint)이라고 하였고 다른 고백서는 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만 주목했다. 하나님을 즐긴다는 것이 다소 경박하게 보이고 불경스런 일로 여겨져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여튼, 소요리에 고백된 인생의 이중적 목적은 아마도 모든 것을 사물(res)과 기호(signa)로 나누고 사물들 중에 사용(uti)과 향유(frui)의 대상을 구분한 어거스틴 사상의 반영이 아닐까 생각한다.

모든 일에 하나님이 즐겁지 아니하면 다른 것을 즐거움의 대상으로 삼는 건 필연적인 결과다. 당연히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는 장식용 구호에 아무리 진실한 핏대를 세운다 할지라도, 실제로는 다른 대상을 즐기는 목적에 하나님도 수단으로 투입되는 기현상이 무의식 중에 벌어지는 거다. '귀신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신 주님의 교훈도 본말의 전도라는 기현상을 어느 정도 경계하고 있다. 본질과 근원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다.

다윗이 하나님 자신을 자기의 기쁨이요 소망이요 만족이요 즐거움이 되신다는 고백에 곡조를 달아 악보가 닳도록 일평생 연주한 이유는 천지 어디에도 하나님 외에는 그의 사모할 자가 없어서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였던 다윗의 우선순위 속에서 우리는 인생의 지향점을 180도 바꾸는 열쇠를 발견한다. 우리의 즐거움이 온전히 하나님께 있다는 열쇠 말이다. 이것을 관념의 유희로만 접수하면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만을 실제로 향유하는 자는 슬픔과 절망과 불만과 괴로움 속에서도 하늘의 미소를 짓는다. 스데반은 살기가 등등한 무리들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상황 속에서도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는 것이 그 증거다.

아~~~ 하나님을 영원토록 향유하는 인생의 목적에 충실하고 싶다. 그렇다고 수도원에 들어갈 생각은 추호도 없다. 범사에 그분을 인정하는 방식의 하나님 향유가 우리에게 열려 있어서다. 모든 것에서 모든 곳에서 모든 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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