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14일 금요일

지극히 작은 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마25:40)

생일파티 옆 자리에는 이미지 관리에 유익한 순서를 따라 거리조절 하는 게 일반적인 현상이다. 누구를 초청하고 어디를 출입할 때에도 동일한 이해관계 주판을 먼저 두들긴다. 표면적 유유상종 개념도 상당히 진화했다. '필요'에 따라서는 다른 가치를 추구하고 정반대의 성향을 보이는 사람도 밀착교제 대상일 수 있어서다. 이에 대해서는 하나님도 만물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시되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지으신 절충적 섭리를 선호하고 계시다는 대목을 부각시켜 정당성을 부여한다. 물론 궁색하다.

'필요'가 성경이 설정한 인간의 존엄성 이상으로 과장될 때 어떠한 면에서든 '작은 자'의 동일하게 존엄한 가치는 무시되고 짓밟히게 마련이다. 사람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고 대상이다. 사람에게 기능적인 우열의 굴레를 뒤집어 씌워 수단화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건 창조자가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지으시고 그에게 부여한 본래의 창조적 가치를 뒤틀고 왜곡하는 행위이다. 백분을 양보해도 이는 하나님과 맞짱을 뜨자는 무의식적 의사표시 아닌가! 창조자를 향한 무례와 오만의 본색은 하나님의 형상이란 가장 높은 가치가 부여된 인간을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나는 법이다.

그 본색의 가장 적나라한 노출은 '작은 자' 앞에서 확인된다. 인위적인 조작의 의식적 무장이 해제되는 건 건질만한 유익이나 혜택의 희미한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는 소자 앞에서다. 강하고 부하고 예쁘고 잘생기고 똑똑하고 유력한 자 앞에서는 온갖 알랑방귀 가리지 않으면서 가난하고 약하고 못생기고 무지하고 부족한 자들 앞에서는 본래의 오만하고 사악한 성질을 있는 그대로 노출하는 사람들을 드물게 목격한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나는 어떤 성질을 부리고 다니는지 스스로를 성찰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님은 '작은 자'의 최상급 표현을 사용하여 '지극히 작은 잘들(τῶν ἐλαχίστων) 중의 하나'를 대하는 동일한 정도만큼 자신을 대하는 것이라고 말씀한다. 작은 자일수록 꾸며지지 않은 인간의 본성을 가장 극명하게 고발한다. 마태복음 25장에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염소와 양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언급될 정도로 정밀한 가시적 바로미터 일번지는 지극히 작은 자들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였다. 지금 교회의 질적 무게를 가늠하는 저울추도 사회에서 존재감이 바닦에 가까운 분들을 대하는 교회의 태도이다.

교회가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가난한 자들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상한 자들을 고치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외치고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고 세상의 모든 슬픔을 위로하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사회의 어두운 뒷골목 인생을 격려하고 세우는 교회가 많아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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