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29일 토요일

프레임을 바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요한일서 4:16)

생계나 생사가 걸린 절명의 난관에 봉착하면, 우리는 곧장 그 사태의 실체를 규명하고 대처하기 위해 평소에 사용하던 해석의 무의식적 프레임을 먼저 손아귀에 거머쥔다. 그리고 난관을 둘러싼 가까운 문맥을 면밀히 살피다가 우리의 머리에 박힌 인과율 기재에 상응하는 원인이 발견되지 않으면 고민의 촉수는 보다 넓은 맥락을 더듬는다. 이때 대체로 등장하는 프레임 중의 하나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주권 사이의 대립이다.

그리고는 상당한 분량의 고민이 그런 틀 속에서 깨달음도 건지고 해법도 나오고 은혜와 위로도 얻는다. 그러면서 삶의 경륜과 프레임은 분리될 수 없도록 맞물린다. 급기야 프레임을 버린다는 것은 살아온 삶의 경륜을 부정하는 것과 같아진다. 그 프레임 없이는 교훈도 생산되지 않고 해법도 설득력을 유실하고 은혜와 위로의 출처도 소멸된다. 당연히 다른 난관들이 그림자 정도의 옅은 고개만 내밀어도 그 프레임은 곧장 투입된다.

그러나 하나님과 인간이 마치 어깨를 겨누는 대립항인 것처럼 '과'라는 대등 접속사로 나란히 연결하는 것의 문제점만 곰곰히 뜯어 봐도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주권' 사이의 대립이란 프레임이 인생의 신비를 다 담아내는 틀이 아니라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이 프레임이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다. 다만 인생의 신비와 성경의 진리가 모두 그것을 기축으로 풀어지는 만사형통 프레임은 아니라는 얘기다.

권장하고 싶은 프레임은 '사랑'이다. 환란 자체와 환란의 가까운 문맥과는 단절적인 추상적 프레임일 수 있겠으나 인생과 성경의 가장 광범위한 영역을 커버하는 해석과 깨달음과 은혜와 처방과 회복의 틀임에는 분명하다. 믿음의 선배들이 다채로운 단음으로 주야장천 내뱉었던 신학적 테마의 돌쩌귀는 바로 '사랑'이다. 이는 어거스틴 해석학을 비롯한 교부들의 해석학적 틀이기도 했다. '사랑'으로 성경이 풀어졌기 때문이다.

성경의 각 구절을 사랑에 이르도록 풀었다면, 삶의 책갈피에 불청객 같이 뛰어드는 인간문맥 단절적인 낯선 환란 구절들을 푸는 열쇠도 사랑이란 프레임이 제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래서 앎과 삶의 프레임은 사랑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

댓글 남겨 주셔서 감사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