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3일 월요일

우리는 주님의 편지다

너희는 우리의 마음에 기록되고 모든 사람들에 의해 알려지고 읽혀지는 우리의 편지라 (고후3:2)

"사도들과 천사라도 성경에 기록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엄중한 사실은 그 울림이 논쟁의 방식이든 선언의 방식이든 교회의 귀전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지속적인 환기가 필요함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들을 대하여 온유하고 잘 가르치며 인내하는 자여야 한다는 진리 전달자의 자세도 올바른 정보와 진리 전달의 필연성에 버금가는 중요성을 갖는다. 이 둘 사이의 배타적인 강조점 차등은 부당하다.

하나님의 진리가 전해지는 것은 바울의 지적처럼 돌비에 새겨진 문자의 구두적 복창이나 해석의 도톰한 살을 덧입히는 문헌적인 방식만이 아니라 나아가 그 진리가 심비에 새겨져 가히 그리스도 예수의 편지라고 일컬을 만한 증인의 인격적인 방식을 통해서다. 신구약을 잘 보존하고 적정과 절도의 묘미를 발휘한 가장 조화롭고 통합적인 해석의 우선적인 중요성을 얕보자는 게 아니다. 이런 선행적인 작업이 없다면 복음의 증거는 한발짝도 못나간다. 오히려 왜곡의 역주행이 필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성경 읽기보다 성도라 일컫는 사람들에 대한 독법에 더 친숙하다. 성도의 성도답지 못한 인격과 언어와 행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도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당한다는 바울의 사도적인 탄식은 모든 시대에 적용된다. 복음의 진리가 땅끝까지 이르는 증인의 방식이 무시 혹은 폄하되면 하나님께 마땅히 돌려야 할 영광이 모독의 흑색으로 변질된다. 진리의 옳고그름 문제가 막중하나 그 중요성이 과장되어 우리로 주님의 종 본연의 자세를 져버리게 만드는 건 사단의 전략이다.

주님께서 온 세상을 향하여 쓰시고자 하시는 편지에 합당한 내용과 질을 묵상하면, 나는 주님의 편지가 아니라는 평가에 일말의 반박도 가하지 못하겠다. 어쩌면 편지의 제질로도 준비되지 않은 듯하다. 먼저는 주님께서 쓰시기에 합당한 편지지가 되고, 주님께서 영원토록 변치 않고 말씀하기 원하시는 신구약 전체의 내용을 담아내되 무릇 나를 본 자는 주님의 편지를 제대로 읽었다는 고백까지 촉구하는 질적 구비에도 부족함이 없는 증인이고 싶다. 물론 마지막 호흡의 순간까지 진행형일 테지마는...

보다 두려운 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편지에 부합하지 않은 중에라도 세상은 우리를 주님의 편지로 읽는다는 것이다. 의도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에 의해 읽혀지고 알려지는 주님의 편지라는 사실에서 하루하루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다. 주님의 마음과 뜻을 왜곡하는 편지로 읽혀질 수 있어서다. 가깝게는 자녀들이 부모를 통해 주님의 왜곡된 편지를 읽는다. 가정이든 세상이든 그런 왜곡의 징후들로 충만한다. 수습의 한계선도 훌쩍 넘어섰다. 교회의 올바른 인식이 필요하고, 회개의 무릎과 행실의 인격적 거듭남이 요청된다.

주님의 편지인지 마귀의 편지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가정과 교회가 많이 무너졌다. 주의 긍휼과 은혜를 구하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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