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7일 금요일

믿음의 뿌리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요4:42)

사마리아 여인이 생존의 양동이도 내던지고 동네로 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증거하여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믿음의 출처가 더 이상 증인의 입술이 아님을 밝히면서 그리스도 자신에게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인 줄 알았다고 고백한다.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는 방식은 누가가 분명히 밝혔듯이 증인을 통해서다. 이는 증인의 인격과 삶을 관통하는 복음의 인격적인 메시지를 증거하는 전도의 방식을 의미한다.

나아가 주님은 한 증인의 인격적 향기와 실천적 광채의 중요성을 넘어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적 증인의 방식도 말하셨다. 세상 사람들은 서로의 삶이 만나 빚어내는 사랑의 어울림을 통하여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임을 인정한다 하시었다. 맞다.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우리는 개개인의 인격과 삶으로 예수님을 보여주고 공동체적 사랑으로 천국을 전파해야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궁극적인 출처는 개인과 공동체의 어떠함이 아니라는 사실을 본문에서 확인한다.

믿음의 뿌리는 그리스도 예수 자신에게 있다. 그렇다면 어떠한 경우에도 믿음이 뽑혀서는 안되고 뽑힐 수도 없다. 그런데 우리는 때때로 교회에서 다양한 이유로 믿음을 내던지는 경우를 목격한다. 물론 무엇보다 원인 제공자가 먼지가 나도록 맞아야 할 일이겠다. 그러나 신앙을 버리거나 하나님을 버리거나 여호와 경외함을 소멸하는 당사자는 이유를 불문하고 스스로 최고의 재앙과 고통을 자초하는 것이다. 원인 제공자는 그에게 합당한 징계를 받겠으나 믿음을 떠난 자도 그에 걸맞은 징계가 뒤따른다.

개인적인 문제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반응하면 된다. 공동체의 문제도 공동체적 차원에서 수습하면 된다. 개인적인 관계의 문제로 개교회를 떠날 수는 있고, 공동체적 문제로 교회가 집단적인 분열을 일으키는 것도 가능하다. 물론 이러한 말은 잘했다는 평가가 아니라 둘 다 아프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우리가 다 부족하고 연약하고 무지하기 때문에 이 땅에서는 늘상 일어나는 일들이란 지적이다. 상처를 입고 억울함을 겪고 배신을 당하면 관계성에 균열이 발생하고 공동체가 갈라진다. 현실이다.

그러나 인간들 사이에 아무리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근거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포기하는 것은 논리적인 모순이며 감정적인 어거지며 오만한 분풀이며 어리석은 판단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었으나 사람이 많은 꽤를 부린다고 한 전도자의 깨달음과 살아있는 사람은 자기 죄로 벌을 받는 것인데 어찌 원망할 수 있겠냐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눈물 젖은 탄식이 이에 대한 변론일 수 있겠다. 문제와 아픔과 고통이 발생하면 오히려 하나님께 더욱 다가가고 신뢰가 깊어져야 마땅하다.

소자의 이러한 단상을 타인에게 적용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착각이다. 자기 자신에게 적용해야 한다. 혹 믿음에서 떠나는 사람들이 있다면 스스로 원인 제공자가 아닌지를 돌아볼 것이며 나 자신이 그리스도 자신 이외의 연유로 믿음에서 떠난다면 아직도 믿음의 출처와 뿌리를 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것에 두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스스로를 돌아보아 돌이키면 좋겠다는 차원에서 나누는 내용이다. 자신의 들보제거 용도이지 타인의 티끌정죄 용도가 아니다. 자기와 타인 사이에 뒤바뀐 말씀의 적용이 늘 말썽을 일으킨다.

사람들의 믿음이 그리스도 자신에게 뿌리를 내리는 것에 대해 사마리아 여인은 서운한 마음을 내색하지 않았던 것 같다. 어쩌면 당연한 것으로 여겼을 수도 있겠다. 설교자나 복음 전도자는 복음과 신앙의 출처나 뿌리가 아니라 이정표요 전달자다. 그리스도 예수는 흥하여야 하고 쇠하여야 할 광야의 소리이다. 글로나 설교로나 복음의 주어인 듯한 존재감 주장이나 확보에 빠져서는 안되겠다. 그리스도 자신만이 복음 자체시고 궁극적인 뿌리시다. 그렇다면 자랑도 없고 믿음에서 떠나거나 내보내는 일도 발생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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