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20일 목요일

복음의 복음다운 증거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고후4:12)

진리가 한 사람에게 심어지는 것은 사망에 가까운 고통을 수반한다.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이다. 좌우에 날 선 검으로서 진리는 생명과 사망의 역사를 동시에 수행한다. 방식은 죽음에 이르는 죄를 죽이면서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은 광야에서 식탁을 내시고 아골 골짜기를 소망의 문으로 삼으신다. 사람이 함부로 공로의 숟가락을 얹을 수 없는 복음의 역설이다.

사람은 죽음에 이르러야 비로소 생명을 경험한다. 구원은 인간의 노력에서 비롯되지 않는다는 증거겠다. 생명에 이르는 합당한 죽음의 수단도 인간이 마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망은 우리의 사랑하는 주님에게 역사했고 그 결과로서 생명은 우리에게 역사했다. 사자의 죽음에서 꿀이 나오는 이치는 인간 문맥에서 생산되고 공유되는 상식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의 섭리이며, 역사의 신비를 푸는 열쇠이다.

진리가 역사의 한 토막에 심겨지는 것은 반역의 땅이 전복되는 변동을 수반한다.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는 반역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땅을 기경하여 진리를 심으시는 하나님의 인자와 성실은 중단되지 아니했다. 짐승을 잡아 죄문제를 해결하는 제사법에 주님의 죽으심이 투영되어 있었다. 이스라엘 역사는 사망과 생명이 손을 맞잡은 역사였다.

한 개인의 삶에서, 죽음 같은 고난의 터널을 길게 지나간 이후 그의 영혼에 진리가 새겨지고 동일한 고난의 착찹한 반복을 경험하는 사람을 그 진리가 살리는 현장을 때때로 목격한다. 사망에 준하는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다'는 다윗의 증언, 그런 배움이 백성에게 수혈되는 사망과 생명의 교차적인 역사도 같은 맥락이다.

한 사람의 인생이 고달픈 고난의 연속이라 하여도 인간문맥 속에서 합의된 기준을 따라 마치 실패한 인생인 것처럼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이는 복음의 속성을 따라 타인에게 생명이 역사하기 위해 사망이 자기에게 역사하는 증인의 연단 과정일 수 있어서다. 한 민족의 역사가 일정기간 어둡다고 하여 저주받은 민족이라 속단하지 말아야 함은 생명의 역사를 준비하는 사망의 기간일 수 있어서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고난을 어떤 식으로든 통과해야 한다. 사망에 버금가는 고통의 세월 속에서 타인에게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는 하나님의 사람이 빚어지기 때문이다. 복음의 속성은 결코 "좋은 게 좋다"는 식이 아니다. 사망과 생명의 조화와 교차이다. 복음의 일꾼이 되고자 한다면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바울의 태도가 요구된다. 너무 비장한가?

그러나 복음이 복음다운 방식을 따라 복음답게 증거되는 방식이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피해가지 못한다. 편하게 배불리 먹고 살 궁리에 분주한 사람은 복음 증거에 전무하는 일꾼의 길을 접으셔야 한다. 어쩌면 이제는 잘 되었다. 목회자의 길이 사회적인 혐오의 눈길을 감수해야 하는 작금의 분위기 말이다. 목회자의 길이 만물의 찌끼 되기를 각오하는 길이 된다면 슬프지만 바람직한 분위기다.

사망은 우리에게 생명은 타인에게 역사하는 것, 이것이 성도의 올바른 삶이요 목회자의 올바른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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