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25일 화요일

권리를 포기하는 신앙

고린도전서 9장 18-19절 

본문의 서두에서 바울은 자신이 자유자며 사도라는 사실을 밝힙니다. 그리고 그런 사실의 증거를 자신이 자신에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는 않고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었다는 사실에서 찾습니다. 성경에서 사도는 진리의 터와 기둥인 교회의 기초를 다지고 골격을 세우는 지도자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당연히 막대한 권위와 권한과 권리를 가지고 있는데도 바울의 사도적 정체성은 거기에서 발견되지 않고 오히려 이 땅에 대접과 환대가 아니라 종의 형체로 오셔서 많은 사람들을 섬기고 자신의 생명도 대속물로 내어 주시려고 오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발견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1. 본문은 바울의 사도권 변증과 연결되어 있다. 뭔가 대단한 권력과 권세와 권한과 권리를 가졌다는 식으로 진술할 법한데, 바울은 자신에게 있는 권리를 다 사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사도성의 증거로 강조한다. 

2.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경건의 핵심이다. 많은 사람들이 소유하지 못해서 누리지를 못하는 것은 불가피한 상황이다. 그러나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리지를 않는 것은 권리의 자발적인 포기에 해당한다. 

3. 권리의 자발적 포기의 모델은 그리스도 예수시다. 이는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함이 합당한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자신을 비워 우리와 같이 인간의 형상으로 오셔서 온갖 고초를 당하시며 죽기까지 아버지께 순종하신 분이시다. 

4. 예수님의 일생은 자기권리 포기의 삶이었다. 대표적인 권리포기 사례를 우리는 예수님이 광야에서 당하신 시험에서 발견한다. 예수님은 성령의 이끌림을 따라 광야로 가셨고 그곳에서 40주야를 금식하신 이후 주리신 상황에서 사단의 치사한 먹거리 시험을 받으셨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한다면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게 시험의 골자였다. 

5. 여기서 사단이 노리고자 하는 것은 1)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란 사실을 스스로 증명하게 만드는 것 (누가복음 4장 34절에 의하면 귀신들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2) 아버지 하나님이 명하신 것과 아무런 상관도 없이 일에 집중하게 만드는 것, 3)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의 뜻을 간접적인 방식으로 순종하지 않게 유인하는 것, 4) 예수님의 불완전한 순종을 유도하여 인류의 구원에 차질을 빚게 만드는 것, 5) 입증하는 순간 예수님이 사단에게 순종한 셈이 되게 만드려는 것 등이겠다. 

6. 그러나 예수님은 사단의 이러한 노림수에 놀아나지 않으셨다. 사단의 제안에 정면으로 반응하지 않았다고 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이 변경되는 것은 아니었다. 예수님은 타인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보여 입증하고 그것에 근거하여 동의를 받아내는 방식으로 존재감을 확보하는 분이 아니시다. 당연히 그렇게 하지도 않으셨다. 

7. 물론 예수님은 창조자 하나님이 되시기에 무에서도 떡을 만드실 수 있고 모든 것들의 주인이기 때문에 돌을 취하여 떡으로 변화시킬 권리와 능력과 명분도 당연히 가지고 계시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사단의 제안에 말려드는 방식으로 반응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기록된 말씀을 가지고 생의 근원을 더욱 뚜렷하게 드러내는 주도적인 반응을 보이셨다. 

8. 사람들은 어떤 것을 행할 권리를 가지고 있고 행할 능력도 구비하고 있으며 게다가 행해야 할 명분까지 있다면 그 권리를 행사하는 것에 어떠한 문제점도 의식하지 못한다. 너무도 당연한 권리를 행하는 것 속에도 어떤 유혹과 시험이 내포되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쉽게 간과한다. 복음서는 예수님이 사람들의 속내는 물론이고 사단의 도모와 생각을 아신다고 기록한다. 지당한 것을 정당하게 행하는 것도 유혹일 수 있다.

9. 예수님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다. 예수님은 모든 예언의 성취요 율법의 마침과 완성으로 이 땅에 오시었다. 일례로 레위기의 핵심은 거룩인데 그리스도 예수는 거룩 자체시다. 예수님의 삶은 말씀이 응하는 삶이었다. 말씀을 따라 자신의 생명까지 포기하는 것이 예수님의 삶이셨다. 

10. 바울의 자기권리 포기는 자기 자신보다 복음을 더 사랑하지 않고서는 취할 수 없는 처신이다. 그러나 내 생명을 버리고자 하면 얻고 구하고자 하면 잃는다는 예수님의 역설적인 말씀은 진리이다. 죽는 게 사는 것이고 포기하는 것이 취득하는 것이다.

11. 구약의 권리포기 사례: 1) 창세기 14:21-24절의 아브라함, “소돔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가지라 아브람이 소돔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하게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실 한 오리가나 들메끈 한 가닥도 내가 가지지 아니하리라 오직 젊은이들이 먹은 것과 나와 동행한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분깃을 제할지니 그들이 그 분깃을 가질 것이니라.” 2) 에스더 8장 11절과 9장 15절의 에스더와 유다인들, “조서에는 ... 유다인에게 허락하여 그들이 함께 모여 스스로 생명을 보호하여 각 지방의 백성 중 세력을 가지고 그들을 치려하는 자들과 그들의 처자를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 그 재산을 탈취하게 하라...유다인이 모여...도륙하되 그들의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아니했다.” 재산을 탈취하는 것은 조서에 분명히 명시된 합법적인 권리였다. 유다인이 적법한 노획물 취득의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나는 사울이 아말렉을 진멸할 때에 재물에 눈이 어두워서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는 최악의 불경을 저질렀던 과거의 역사를 유다인이 기억으로 더듬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사울은 하나님이 금하신 것을 취했으나 에스더의 유다인은 적법한 것까지도 챙기고자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묘하게 중첩된다. 

12. 여기서 유다인의 태도가 주는 교훈이 심히 육중하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이 설정한 삶의 범위에 종속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무리 세상에서 적법하게 합의된 권리나 자유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빛이 발휘되는 계기가 아니라면 과감하게 거절하고 스스로를 쳐서 제한할 수 있어야 한다. 다다익선 차원에서 무엇이든 있을 때 챙기고자 하는 순간 오히려 유혹의 덫에 걸려든다. 나에게 유익하던 것이 배설물과 해로움의 근원일 수 있음은 이미 바울이 똑 부러지게 잘 말하였다. 자유와 권리가 극대화된 나라와 시대에서 관찰되는 공통된 교회의 모습은 세상과 구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다운 면모가 사라지고 맥아리도 없어진다. 삶의 원리와 규범인 하나님의 말씀에 제어를 받는 삶이 아니라 세상이 허락한 자유와 권리 구가하는 일에 급급했기 때문에 초래된 결과일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하겠다. 

13. 바울은 자신의 권리를 다 사용하지 않는 것을 사도의 증거로 제시했다. 나아가 그런 포기가 하나님께 자신이 받을 상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자기권리 포기를 “절제”라는 성령의 마지막 열매와 연결한다.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은 성숙의 증거이다. 성숙한 사람만이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고 타인을 중심으로 생각한다. 자아에 갇힌 사람은 자신과 관련된 어떠한 것도 포기하지 못한다. 보다 큰 이익을 위해 작은 이익을 희생하는 차원의 포기는 가능할지 몰라도 진정한 의미의 자기권리 포기는 기대할 수 없다. 

14. 바울은 모든 사람들에 대해 자유하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는 막대한 자기권리 포기의 길을 고집했다. 바울은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다른 곳에서 그는 이러한 자신의 실상을 만물의 찌끼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막10:44)”는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본다면 바울은 모든 사람들 중에 으뜸이 된 사도였다. 예수님이 비천한 말구유를 인생의 입구로 삼으시고 비참한 십자가를 인생의 출구로 삼으시는 실질적인 종의 행보로 일관하신 것처럼 바울도 그런 식으로 으뜸의 길을 걸었다.

15. 권리를 포기하는 것은 단순히 모든 것들을 실컷 누리다가 마치 적선하듯 남에게 여분을 양도하는 ‘처분’이 아니다. 자신의 마땅한 자유를 제한하되, 타인의 유익을 위해 살 권리마저 상대적인 수단으로 돌릴 수 있는 예수님의 희생적인 십자가 인생을 방불하는 삶을 의미한다. 사망은 내게 역사하고 이로 말미암아 생명은 타인에게 역사하는 삶이 자기권리 포기이다. 그런데 그런 포기의 삶을 바울은 하나님께 받을 상급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대목이 중요하다. 내 권리를 스스로 취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상급을 선택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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