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19일 수요일

종교개혁 시대에서 정통주의 시대까지: 근대 초기의 개혁주의 전통

멀러 교수님의 총신대 발표논문 한역본 (Calvin and the Reformed Tradition, pp.13-50에 보다 확대된 글로 수록됨)

1. 종교개혁 및 정통주의

16세기 초중반의 종교개혁 발발과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반까지 발생한 반고백적 움직임 사이에는 개신교 신앙과 신학, 교회적 문화와 지성적 문화에 있어서 현저한 발전이 있었다. 신앙의 고백화와 신학적 체계화의 관점에서 볼 때 그러한 발전은 제도적인 형태의 개신교 출범으로 묘사될 수 있으며, 그러한 개신교의 형태는 종교개혁 시대에 발생한 로마와의 단절이란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고 주로 1세대와 2세대의 종교 개혁자들이 작성한 신앙 고백적 문헌들을 가지고 종교적 교리적 정체성 정립을 시도하는 태도 속에서 틀지워진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이는 고백적 정통주의 개신교 사상의 발전이며 혹은 일반적인 칭호로서 개신교 정통주의 이름으로 불리운다. 방법론적 관점에서 그 발전을 진술하고 분석하는 것은 기존의 연구 문헌들이 취하였던 방법으로 여러 개인들의 신학과 주요 신앙 고백적 논쟁들을 단순히 해석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복잡하다.

칼빈과 같이 한 명의 중요한 신학자의 가르침을 통해서는 그런 개혁주의 전통의 발전을 해석할 수 없으며 칼빈 당시의 발전조차 풀어낼 수 없다고 한다면 하물며 거의 두 세기의 기간동안 일어난 발전을 해석하는 것은 얼마나 더 어려울 것이다. 비록 로마 카톨릭 학자들과 루터주의 학자들과 알미니우스 교리와 관련된 논쟁까지 분석한다 할지라도 그 발전상을 보여주는 적합한 그림은 제공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신앙 고백적 차원까지 이르지 않은 논쟁들도 대단히 많고 비록 교리적 체계화의 다양성을 따라 발전하긴 하였으나 중요한 논쟁의 주제가 되지는 않았던 논쟁들도 대단히 많았기 때문이다. 종교개혁 일반이나 특별히 개혁주의 전통은 무에서 산출되지 않았다. 중세 후기의 종교적 신학적 문맥 안에는 광범위한 중세 후기적 종교개혁 배경이 있었으며, 종교개혁 및 종교개혁 이후의 개신교로 흘러 들어간 다양한 신학적 흐름들도 있었다. 게다가 그것들을 수용하는 형태에 있어서도 신학자들 개인마다 다양했다.

개신교의 신학 발전에 대한 최근의 연구들은 기존의 학문연구 일반이 보여준 과도하게 단순화된 설명을 거절하고 그 발전의 복잡성과 다양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한때 신학의 밀봉된 상자로 묘사된 종교개혁 시대는 이제 중세로 소급하고 근대 초기까지 확장된 보다 광범위한 문화적 배경 속에서 이해되고 있다. (그 시대의) 개신교 신학자들 개개인은 이제 전적으로 새롭고 극도로 성경적인 신학의 산출자로 이해되지 않고, 그의 직접적인 신학적 뿌리는 중세 후기의 신학적 토양에서 발견해야 하고 그의 규범적인 자료들은 교회의 보다 오래된 전통의 보다 포괄적인 영역을 포함하는 과히 보수적인종교 개혁자로 이해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게다가 상당수의 학자들이 루터, 멜랑톤, 쯔빙글리, 불링거 및 칼빈과 같은 종교 개혁자들 개개인은 그들의 스승들과 직접적인 선행자들 사상 혹은 그들의 동시대 인물들의 신학적 체계와 동떨어진 독특한 신학의 창시자로 이해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개신교 신학 발전의 복잡성과 다양성에 대한 이러한 접근법의 중요성은 특히 때때로 칼빈주의로 규정되는 개혁주의 전통에 대한 연구에서 분명하게 확인된다. 칼빈 이전 시대에 이 전통의 발전에 기여한 사람들로 개인적인 방식이든 다른 사람과의 협의를 통해서든 개혁주의 고백 문헌들의 첫번째 겹을 형성한 여러 인물들을 포함한 중다한 수의 종교 개혁자들이 있었으며 칼빈 자신의 신학은 이러한 기존의 문맥과 자기 세대의 다른 종교 개혁자들과의 대화 속에서 발전된 것이라는 사실을 보건대, 개별 인물들을 이러한 보다 광범위한 종교적 신학적 문맥에서 분리하면 개혁주의 신학의 발흥 즉 특별한 개혁주의 전통의 형성은 제대로 분석될 수 없거나 올바르게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개별 인물들의 신학적 체계화는 문맥에서 분리해서 보거나 개개인들 간의 일대일 비교를 통해서는 올바르게 파악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존 맥닐(John T. McNeill)도 인지하고 있었다. 그는 『칼빈주의 역사와 특성(History and Charater of Calvinism)』 서두에서 개혁주의 전통의 발전은 처음부터 칼빈과 쯔빙글리 신학 사이에 무시할 수 없는차이들을 이미 가지고 있었으며 그렇다고 그러한 차이들이 신앙 고백적인 전통을 분리하는정도까지 심각했던 것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맥닐은 이렇게 결론을 맺는다. ‘그러므로 불가피한 약어로서 지금 칼빈주의로 불리는 쯔빙글리 사상을 그것보다 광범위한 운동의 일부로 규정하는 것은 어떠한 부조화도 초래하지 않는다.’[1] 물론 그런 약어는 불가피한 것이 아니며 우리는 칼빈주의(Calvinist)’ 대신에 보다 정확한 용어로서 개혁주의(Reformed)’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두 개혁주의 전통을 주장하며 칼빈과 불링거 사이의 지적인 이간을 시도하고 혹은 칼빈의 신학과 칼빈의 이탈로 규정되는 베자의 신학 사이에는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가 있다는 식으로 주장하며 칼빈과 베자 사이의 불화를 조장하는 시도들은 불합리한 근거 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그러한 시도들은 하나의 신학적 전통 내에 개별적인 다양성이 있다는 것을 수용하지 못한다. 신학자들 개개인의 교리적 체계화를 위해 다양한 선행자들, 자료들 및 문맥들이 있다는 사실도 수용하지 못한다. 나아가 신앙 고백적인 전통의 형성과 발전이 교리적 체계를 세운 다양한 그룹의 인물들이 개입하여 이루어진 사실도 관찰하지 못하고, 전통이 다양한 환경에서 저술된 일련의 문헌들에 의해 묘사되는 것이라는 사실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전통 자체에 속한 관계성과 차이점의 유형들도 파악하지 못한다. 방법론의 관점에서 보면, 그러한 이간적인 시도들은 한 주요 신학자의 교리적 체계화가 가지는 보다 구체적인 특징들이 동일한 신앙 고백적인 전통 안에 속한 다른 인물들에 의해서는 어떻게 다르게 수용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지각하지 못한다.

2. 중심인물 접근법(Master Narratives)의 종식

종교개혁 및 16세기 후반과 17세기 개신교 안에서 나타난 발전의 본질과 특성에 대한 재평가 작업은 최근 50년간 이루어진 근대 초기의 신학적 역사 연구의 중심 주제였고 근대 초기 개신교 사상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현저하게 개선해 주었다. 지성사적 관점으로 본다면, 그 재평가의 일부는 종교개혁 역사를 연구하는 자들 편에서 이루어진 종교개혁 이전의 스콜라주의 및 인문주의 시대에 대한 학문연구 일반을 받아들인 것에 근거한 것이다. 그런 연구 결과가 개신교 사상의 신앙 고백적, 교회적, 학문적, 교의학적 체계화의 발전에 적용될 때에 종교개혁 및 그것을 이어간 정통주의 모두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현저하게 변화시켜 주었다. 이러한 스콜라주의 및 인문주의 연구는 종교개혁 시대에서 정통주의 시대로 이어지는 발전에 대한 기존의 해석을 옹호한 학자들이 제대로 받아들인 적이 없었던 연구이다. 스콜라주의 및 인문주의에 대한 변화된 이해를 가진 새로운 학문연구 풍조는 개신교 사상의 발전에 대한 기존의 여러 입장들을 산출한 학자들이 크게 간과했고 그런 입장들을 끝까지 고수하는 자들에 의해 계속 간과되어 왔던 방대한 규모의 문헌들을 펼치기 시작했다.

개혁주의 사상의 근대초기 발전을 다시 평가하는 작업은 그 분석의 틀을 주로 개혁주의 전통의 연속성과 불연속성 및 다양성 등과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재평가에 대한 이러한 접근법은 개혁주의 전통 자체의 본질과 특성에 대한 논의를 포함하고 있으며, 개혁주의 전통 자체의 초기 시기들과 초중기 정통주의 시대로 불리우는 개혁주의 사상의 이어지는 시기들 속에서 일어난 교부들과 중세 학자들의 신학적 문헌들에 대한 개혁주의 수용 및 사용에 대한 탐구까지 포함하고 있다. 게다가 대단히 방대한 개혁주의 개신교 문헌들을 고려할 때, 재평가의 이러한 요소들은 기존의 학문연구 일반이 고수했던 중심인물 접근법의 결함을 대체할 충실한 대안으로 이해되지 않으면 안된다.[2]

기존의 중심인물 접근법(master narrative) 19세기와 20세기의 교의학적 관심사에 주로 의존하고 있는 광범위한 신학적 일반화와 근대초기 지성사에 대한 후기 칸트적 이해에 기초한 일련의 철학적 전제들로 특징지어 진다. 그 접근법의 신학적 형태와 철학적 형태는 모두 서로 대립되는 철학으로 간주되는 스콜라주의와 인문주의 사이의 갈등에 기초하여 만들어진 중세와 종교개혁 사이의 꽤나 극단적인 단절을 가정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게다가 이 접근법은 스콜라주의를 중세의 철학적 체계로 간주하고 그것을 종교개혁 신학과 정면으로 대립되는 것으로 보았으며, 최소한 개신교 사상의 제대로이해된 관점에서 볼 때 중세 말기와 더불어 그 기능이 상실된 것이라고 이해했다. 나아가 그 접근법은 어떤 개인들과 어떤 문헌들을 추앙하되 동시대 인물들 혹은 역사적 맥락들에 대한 관심을 배제시킬 정도로 높이는 역사의 위대한 사상가접근법과 연관되어 발전해 왔다.

간단히 말하면, 그러한 신학적 접근법의 대다수 유형들은 칼빈을 컨텍스트 밖으로 끌어올려 개혁주의 전통 혹은 칼빈주의창시자로 규정하고 혹은 『기독교 강요』를 칼빈 자신의 사상의 근원적인 자료로 삼을 뿐만 아니라 개혁주의 전통에서 이어진 모든 발전들을 이해하는 규범으로 간주하며 긍정적인 방향이든 부정적인 방향이든 칼빈과 칼빈주의자들 사이의 관계성에 대한 논쟁을 양산했고 전통의 본질을 왜곡시켜 왔다. 이러한 접근법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유형을 가지고 있다. 두 개는 예정론과 언약론에 관한 교리적 주제와 관련하여 19세기에 발생한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신정통주의와 결부된 그리스도 중심주의 개념에 기초하여 20세기에 발생한 것이다. 주로 알렉산더 슈바이처(Alexander Schweizer) 문헌과 관계되어 있고 하인리히 헤페(Heinrich Heppe)의 연구에 의존한 첫번째 유형은 예정론을 칼빈주의 교의학의 중심으로 이해하며 칼빈 자신은 그 입장의 선두 주자이며 신학의 예정론적 체계로 이해되는 이후 칼빈주의 발전과의 연속성 속에 있다고 주장한다.[3] 두번째 유형은 칼빈적인 예정론적 궤적과 멜랑톤적 독일 개혁주의 흐름 사이를 구분한 헤페의 입장에 기초한 것으로서 언약을 칼빈과 칼빈주의자들의 예정론적 접근법의 중심적인 대안으로 이해한다.[4] 세번째 유형은 여러 신정통주의 학자들과 연계된 것으로서 칼빈의 신학을 신정통적 신학의 표준으로 확정하고, 그의 사상을 그리스도 중심적인 모형으로 흡수하고, 칼빈과 예정론적 칼빈주의 인물들 사이에는 대립적인 관계가 있는 듯한 논리를 펼친다.[5] 이 세 가지 유형들은 모두 대단히 다채로운 역사적 발전에 고도의 교의학적 일반화를 과도하게 강요하는 환원주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신학적 접근법을 따라 자주 읽혀지는 근대 초기 철학사에 관한 심각한 중심인물 접근법은 종교개혁 발흥을 스콜라주의 및 서구 아리스토텔레스 전통의 종결로 이해하고 그것의 17세기 속에서의 지속은 퇴화된 흔적으로 간주하며 합리론이 귀납적인 데카르트 형태이든 연역적인 베이컨 형태이든 다른 다양한 철학들과 아무런 마찰을 일으킴도 없이 출범하여 기존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전적으로 대체하게 되었다고 단언한다. 이런 접근법은 17세기 개신교 신학자들 중에 소요학파 전통의 역동적인 지속성과 스콜라적 방법론의 지속적인 활용을 납득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으며 이로써 개신교 정통주의는 종교 개혁자들 사상을 이탈하게 되었다는 입장을 개진했다.[6] 실제로 근세 초기 철학의 여러 역사들 안에 언급되는 전형적인 인물들은 데카르트, 스피노자, 말레브랑쉬, 라이프니츠, 로크 등이며 때때로 베이컨이 언급되고 가상디가 보다 드물게 거명된다. 이들은 모두 과거와의 거대한 단절을 보여주는 사례요 근대성의 창시자로 취급된다. 이러한 보다 넓은 철학적 접근법과 결부된 것으로서 개신교 사상에 대한 두 가지의 주요 대안적인 접근법이 등장했다. 첫번째 접근법은 르네상스 운동을 중세의 미신을 제거하기 시작하고 인간에 초점을 둠으로써 그 미신을 대체한 운동으로 간주하고, 종교개혁을 신학적 철학적 자유의 원천으로 간주하고 잘된 일이든 잘못된 일이든 합리론의 효시로 규정한다.[7] 중심인물 접근법은 이러한 이해를 뒤따라서 개신교 정통주의 및 그것의 스콜라적 경향성을 종교개혁 정신과 맞서는 교조주의 형태로 간주하며 그 관점이 너무도 계몽 반대적인 것이어서 르네상스 및 종교개혁의 진정한 계승자인 합리론이 결국 승리하게 되었다고 해석한다.[8] 두번째 대안적인 접근법은 성경에 대한 종교개혁 신학적 강조를 신앙주의로 간주하고 정통주의 및 개신교 스콜라주의 시대를 계몽주의 등장에 길을 열어준 합리주의 쪽으로의 선회로 해석한다.[9] 두 경우는 모두 17세기 개혁주의 사상의 전통적인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스콜라주의를 합리주의 등장의 전조로 해석하되 개신교 정통주의를 합리론 혹은 원형 합리론의 한 유형으로 규정하는 교의학적 주장의 노선을 따르고 있다.[10] 물론 중세적 스콜라주의가 합리론의 한 형태인 것처럼 잘못 해석되고 스콜라적 방법론의 실재가 여러 세기에 걸쳐 발전되고 변화된 것으로 이해되지 않는다면, 학자들이 주장하는 개신교 스콜라주의의 합리론은 합리론의 선행자가 될 뿐만 아니라 이전의 합리론이 재연된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신학과 철학의 중심인물 접근법의 모든 유형들은 인문주의 발흥과 스콜라주의 몰락이 예고한 르네상스 및 종교개혁 내에서의 중세 말기에 대한 근대의 거대한 중심인물 접근법에 빚지고 있다. 그것의 가장 유명한 형태는 제이콥 벌크하르트(Jacob Burckhardt)의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명(Civilization of the Renaissance in Italy)』에서 발견된다.

중세에는 바깥을 향하고 내면을 향하는 인간의식 양면이 모두 공통된 베일 아래에서 꿈꾸고 있거나 반쯤 깨어난 상태였다. 그 베일은 믿음과 망상과 강박으로 짜여진 것이며 그 베일에 의해 보여지는 세상과 역사는 낯선 색조로 얼룩진 듯하다. 이 베일은 먼저 이탈리아에서 녹아 내렸으며 이로써 국가와 이 세상의 모든 것들에 대한 객관적인 취급과 고찰이 가능하게 되었다. 동시에 주관적인 측면도 그에 상응하는 강조점을 획득하게 되었다. 인간은 영적인 개별체가 되었고 자신이 그러한 존재라는 것도 인지하게 되었다.[11]

벌크하르트에 따르면 인문주의는 중세적 문화와 전적으로 대립된다.

교회가 중세 시대에 양성한 전적으로 성지자 중심적인 문화 전체와 맞서는 경쟁자로 중세의 다른 요소에 기초하여 등장한 새로운 문명이 있다. 그 문명의 역동적인 대표자격 인물들은 고대 인물들이 알았던 것을 알았으며, 그들이 생각하고 이해했던 것처럼 생각하고 이해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영향력이 커지게 되었다.[12]

이러한 화법들이 가진 근본적인 문제는 그것들이 19세기적 기원을 가지고 있으며 16세기와 17세기에 실제로 존재했던 사유의 흐름들을 전혀 반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세의 사상과 문화에 대한 재평가는 인문주의가 중세의 지적 문화의 산물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스콜라주의의 계승자가 아니라 13세기의 대학 교수사회 안에서 동일하게 발전했던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13] 이러한 재평가는 또한 인문주의스콜라주의모두가 주로 방법론을 가리키되 특별히 중세 대학의 여러 교과과정 영역들에 적용되는 논법의 유형들 혹은 모델들을 가리키는 말이며 두 방법론 모두가 근대 초기로 유입되어 왔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스콜라적 방법론에 대한 최근 연구들은 스콜라적 방법이 중세에서 시작하여 인문주의 관심사에 적응한 것을 포함한 일련의 발전들과 수정들을 거쳐 심지어 18세기 초반까지 지속되어 갔다고 주장한다.

종교 개혁자들의 문헌들에 대한 최근 연구들은 중세적인 배경을 신중하게 살피되 때로는 개별적인 인물들의 성직 및 학문적인 배경과 결부되고 때로는 중세 후기의 자료들을 수용했던 다양한 유형들과 결부된다. 그래서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중세 후기 유명론의 선조들, 은둔파 어거스틴 수도원 내에서의 다양한 사상적 흐름들, 에어푸르트에서 공부하며 수용한 중세적 사상의 다양한 갈래들, 가브리엘 비엘의 신학에 대한 루터의 이해 등와 관련해서 연구되고 있다.[14] 피터 마터 버미글리(Peter Martyr Vermigli) 사상은 중세신학의 토마스 및 어거스틴 계보들에 담긴 배경들과 연관되어 분석되고 있다.[15] 칼빈의 문헌들은 버나드 끌레르보를 비롯하여 중세적 스코투스 및 어거스틴 사상까지 포괄하는 중세 사상의 다양한 계보들의 영향을 보여준다. 물론 그가 실제로 인용하고 있는 자료들 외에 다른 특정한 배경들 혹은 그런 자료들의 수용 형태들에 대한 확정적인 규명은 곤란하다.[16]

이와 유사하게 최근 연구들은 종교 개혁자들의 학문적인 활동과 중세 및 동시대 문헌들에 대한 수용의 다양성과 관련하여 신학적 문헌들에 대한 스콜라적 접근법 및 인문주의 접근법의 어떤 측면들은 수용하고 어떤 측면들은 거절하는 다양한 유형이 있다는 사실과 함께, 그들의 사상에 인문주의 및 스콜라적 요소들이 다양하게 혼재해 있다는 사실도 규명해 주었다. 스콜라 신학과 철학에 대한 루터와 칼빈의 잘 알려진 반박에 대한 평가도 그들의 사상과 중세 후기의 여러 인물들의 가르침 사이에 어느 정도 연속성이 있다는 인식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그들의 글들에서 발견되는 스콜라적 방법의 요소들과 용어들 연구로 말미암아 미묘하게 조정되고 있다.[17] 게다가 스콜라적 방법과 인문주의 방법 지지자들 사이에 이루어진 르네상스 및 근대 초기 시대에 대한 실제적인 논쟁은 서로 명백하게 대립적인 형태로 신학에 유입되지 않았으며 그렇기 때문에 종교 개혁자를 인문주의 학자로, 종교개혁 자체는 인문주의 현상으로 규정하는 것은 문헌들에 대해 근본적인 오해가 있었음을 보여줄 뿐이다.[18] 칼빈과 같이 인문주의 훈련을 받은 종교 개혁자의 사상에도 스콜라적 요소가 확인되고 있으며, 칼빈의 인문주의 수용은 그 자체가 고전적 인물들에 대한 인문주의 연구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철학적 발전에 맞서는 그의 반박에 의해 조절된 것이다. 이는 에피쿠루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에 대한 칼빈의 반박에서 확인되고, 어떤 경우에는 소피스트 학자들에 대한 그의 반박에서 확인한다.[19]

종교 개혁자들의 광범위한 서신교류 연구에서 확인된 것처럼, 그들은 서로 의견을 교환하고 교리적 사안들을 논하였고 논박도 하였지만 어느 한 신학자의 교리적 체계가 다른 신학자에 비해 월등함을 보여주는 어떠한 암시도 제공하지 않는다. 몇 가지 사례만 언급해도 충분할 것이다. 부써(Bucer) 1549년 쮜리히 합의서(Consensus Tigurinus)의 여러 부분들에 대해 칼빈을 비판했다. 부써는 특별히 그 문헌이 그리스도 연합 혹은 그리스도 참여에 대한 명료한 언어가 억제되고 있다는 것과 그리스도의 몸이 하늘에 있다는 것을 너무 지나치게 주장하고 있다고 지적했다.[20] 1555년부터 칼빈과 버미글리 및 라스키는 여러 교리적 사안들에 대해 서신을 교환했다. 거기에서 칼빈은 구체적인 내용은 밝히지 않으면서 예정의 해석에 있어서 자신과 라스키 사이에 불일치가 있다고 언급하고 있으며, 다른 대부분의 사안들에 대해 라스키와 근본적인 합의가 있지만 성찬에서 그리스도 안에 참여및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대한 라스키의 강조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21] 칼빈보다 12살이 많고 1540년대 중엽에 부써 및 불링거와 더불어 성찬식에 대한 사안을 논하였던 라스키는 칼빈으로 인해 자신의 교리적 체계를 바꾸지는 않았다.[22] 칼빈과 버미글리 사이에 교환한 현존하는 편지는 (칼빈보다 12살이 많은) 버미글리가 칼빈의 멘토로 불리울 정도의 상호의존 관계가 있었음을 증거하고 있다.[23] 그리스도 연합론의 경우, 칼빈과 베자에게 보낸 버미글리 편지는 그가 그 교리를 체계화한 주요 인물임을 증거한다.[24]

이뿐만 아니라 17세기 개혁주의 인물들은 칼빈주의자들로 불려지는 것을 대체로 불쾌하게 여겼으며 칼빈을 중요한 선행자들 그룹의 일원으로 여겼지 그들의 고백적 전통의 설립자나 규범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25] 그들이 교리를 체계화한 유형들도 칼빈주의에 대한 그들의 이해를 반복하고 있다. 즉 그들은 대체로 주요한 종교 개혁자들 중의 어떤 인물을 통하여 중세 및 심지어 교부들의 시대로 소급될 수 있는 성경 해석학의 궤적을 따르며 그들의 동시대적 논쟁과 대화라는 문맥 속에서 그들의 교리들을 체계화해 나간 것이다. 그들의 문헌에서 발견되는 개념화의 특별한 유형들을 살펴보면 때로는 칼빈을 의지하고 때로는 불링거, 무스쿨루스, 버미글리, 혹은 종교개혁 시대의 다른 학자들을 의지하는 등 종교 개혁자들 개개인이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지점에서 자연스레 떠오르는 방법론적 질문은 중심인물 접근법의 사용과 관계된 것으로서 근대 초기 개혁주의 사상사에 관한 기존의 중심인물 접근법이 거절된 것을 고려할 때 그럼 어떻게 새로운 중심인물 접근법이 구축될 수 있느냐일 것이다. 답은 간단하다. 새로운 중심인물 접근법은 만들어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거절된 그런 중심인물 접근법이 철학적 혹은 신학적 구성물에 의존하고 역사적 자료들에 대해서는 여전히 빈약한 토대를 보인 것처럼 새롭게 고안될 다른 어떤 중심인물 접근법도 그러할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중심인물 접근법을 제거하기 위한 대안으로 탈근대적 도전들 중 하나를 취하는 것이 아니며, 메타역사 제거를 위해 이론적 관점들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국부적 네러티브 접근법을 발굴하는 것도 아니다.[26] 중심인물, 메타, 혹은 국부적 접근법 모두가 가진 문제점은 정확히 그것들이 소위 이론적인 관점들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핵심은 자료들을 연구하는 것이고 그 자료들 자체에 근거한 이야기를 구성하되 방법론이 허락하는 한 역사가가 지금 가지고 있는 철학적 신학적 전제들 혹은 편견들을 최대한 적게 요구하는 이야기를 구성하는 것이다.[27] 앞으로 나는 기존의 중심인물 접근법의 구체적인 내용들과 근대 초기 개혁주의 사상의 재평가 작업이 제시하는 구체적인 주장들을 보다 상세하게 다루되 기존의 접근법에 대해서는 지속적인 비판을 가하고 새로운 접근법에 대해서는 그 전제들을 명료하게 밝히고자 한다.

2. 방법론과 내용

기존의 미심쩍은 중심인물 접근법의 몰락을 초래한 핵심적인 내용들 중의 하나이며 근대 초기 개혁주의 사상의 재평가에 있어서 중심적인 주장들 중의 하나는 스콜라주의와 인문주의가 특정한 철학이나 신학이 아니라 지성의 역사와 특별히 중세 및 근대 초기의 학문적인 배경에 속한 현상으로 올바르게 여겼다는 점이다. 근대 초기에 신학의 체계를 확립하고 표상하기 위해 도입된 방법들과 그 시대의 인물들이 주석적, 신앙 고백적, 전통적, 철학적, 상황적 관심사에 기초하여 산출된 신학의 교리적 내용으로 정당하게 불리울 수 있는 그 결론들 사이에는 구분이 만들어질 필요가 있다. 이러한 구분은 스콜라주의 및 인문주의 모두와 관련해서 만들어질 필요가 있고 그것들이 종교 개혁자들 및 이후의 개신교 학자들의 문헌에 미친 영향들에 대해서도 그런 구분이 요청된다. 물론 이것은 방법과 내용이 전적으로 분리될 수 있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방법과 내용의 상호 연관성을 부정하려 하지 않는다. 논지의 핵심은 (스콜라적 방법이든 인문주의 방법이든) 방법론이 특정한 교리적 내용을 산출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를 테면, 방법론이 어거스틴 은총론 혹은 반 펠라기안 은총론, 혹은 형이상학 지배적인 예정론적 체계를 산출하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28]

논지는 단순하다. 실제로 그것은 너무도 자명한 것이다. 그러나 개신교 스콜라주의에 대한 기존의 개념적 이해들, 특별히 칼빈주의자들과 대립되는 칼빈접근법의 옹호자들 사이에 지금도 모호하게 남아 있는 개념들 때문에 초래된 주요 혼돈에 대해서는 그것이 자명하지 않다는 사실은 언급할 필요도 없다. 이러한 결핍된 미신을 구체화한 연구를 포함한 최근의 여러 연구들은 마치 방법과 내용을 구분하면 방법이 내용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구분(의 의미) (대놓고) 잘못 표상하여 논지에 더 큰 혼돈을 초래하고 있다.[29] 그러므로 여기에서 우리는 칼빈주의자들과 대립되는 칼빈을 주장하는 문헌들이 보여주는 스콜라주의와 예정론적 체계 사이의 혼돈 및 스콜라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사이의 혼돈과 관련하여 보다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예비적인 주제로서, 스콜라주의는 철학적인 것이든 신학적인 것이든 특정한 내용이나 결론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주로 방법론, 특별히 학문적인 방법에 관한 개념이고 이와 동일하게 인문주의 혹은 특정한 결론이나 내용에 대한 것이 아니라 방법론, 특별히 문헌학적 방법론에 대한 개념이며, 그 개념들은 개신교 스콜라주의에 대한 칼빈주의자들과 대립되는 칼빈식의 해석을 거절하기 위해 수정주의 입장을 취하는 학자들에 의해 고안된 개념들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겠다. 오히려 그 개념들은 여러 세대에 걸친 중세 및 르네상스 역사가들에 의해 공동으로 주장되어 온 개념이며,[30]칼빈주의자들과 대립되는 칼빈학파가 스콜라주의 개념에 교의학적 변경을 가하기 이전에 이미 정착된 개념이며, 그 학파가 칼빈 및 이후 개혁주의 인물들의 사상을 표상할 때에 일관되게 간과해 왔던 개념이다. 달리 말하면 스콜라주의를 주로 방법론 가리키는 것으로 규정하는 것은 개신교 스콜라주의의 재평가를 확립된 지성사적 궤도에 올려 놓는 것이며, 스콜라주의에 내용을 부과하는 칼빈주의자들과 대립되는 칼빈학파의 개념은 근거 없이 형성된 것이며 솔직히 말하면 학자적 성실성이 결여된 개념이다. 이러한 성실성의 결여는 특별히 그런 주장의 최근 유형들 안에서 발견된다. 이는 그 유형들이 개신교 스콜라주의 주제에 대한 최근 수정주의 문헌들을 인용하되 단지 부분적인 선별 방식으로 인용하고 있으며, 게다가 근대 초기의 개신교 사상에 관한 수정된 관점 형성의 한 요소로서 일관되게 고려되고 있는 인문주의 본질과 스콜라주의 본질의 중요한 학문연구 흐름을 아우르지 못하고 있으며, 나아가 근대 초기 개신교의 스콜라주의 재평가 과정에서 분석된 내용들도 간파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칼빈주의자들과 대립되는 칼빈입장은 스콜라주의가 개신교 신학에 침투한 것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적 헌신에 일정하게 의존하고 특별히 신론과 관련해서 형이상학 문제와 추상적 사색적 사유에 대한 명시적 관심사를 암시하는... 연역적 추론의 형태를 낳았으며, ‘독특한 개신교 입장하나님의 의지론에 대한 사색적 체계화에 기초하여 형성되게 하였다고 주장한다.[31] 이런 종류의 주장은 스콜라주의와 인문주의 사이의 잘못된 이분법을 만들었고, 이는 그 둘을 신학적 내용이란 관점에서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 주장은 스콜라적 노선이 논증에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적, 예정론적, 선험적, 심지어 전적으로 삼단논적 성격을 가졌으며, 인문주의 노선은 논증에 있어서 반아리스토텔레스적 (아마도 플라톤적), 언약적, 후험적 특성을 가진다고 주장한다.[32]제한적 속죄,’ 엄격한 예정론 사상, 건조한 교의학적 신학을 생성하는 것은 스콜라주의이며, 인문주의는 보편적 속죄,’ 언약적 혹은 구속사적 사유 및 성경적 신학을 지향하고 있다고 구분한다.[33] 칼빈 사상의 추진력이 되는 인문주의 때문에 칼빈은 당시에 조직신학으로 행세하던 신학을 정죄한 것에서 암시된 것처럼 하나의 시스템이 아니라 균형 잡힌신학을 산출했던 반면, 스콜라주의는 그러한 칼빈 사상의 균형을 파괴한 원흉이라 주장한다.[34] 이러한 주장들은 마치 역사가 가지런한 비둘기 집처럼 말끔하게 기술될 수 있는 것처럼 기본적인 스톨라주의-인문주의 이분법 위에 인위적인 방식으로 급조한 이분법들, 즉 예정론 사상과 언약론 사상, 선험적 사상과 후험적 사상, 제한적 속죄와 보편적 속죄처럼 깔끔하나 지지될 수 없는 일련의 이분법에 의해 특징지어 진다.[35] 또한 이 주장들은 칼빈이 그 비둘기집 중 하나에 들어갈 수 있고 개혁주의 전통 전체의 발전을 평가할 간편한 척도로서 사용될 수 있다는 기괴한 가정에 의존하고 있다. 여기에서 평가는 칼빈의 신학이 그 자체로 개혁주의 전통 전체를 탐구하고 평가하는 완전하고 충분한 주체라고 주장하는 현대의 일부 조직신학 학자들의 고도로 시대 착오적인 접근법에 기초한 것이다.[36]

최근에 수정주의 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개혁파 정통주의 연구를 면밀히 관찰한 독자라면 스콜라적 방법론과 교리적 내용 사이의 관계성 문제에 있어서 제기되는 여러 견해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 견해들은 스콜라적 방법론과 교리적 내용이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연구는 방법론 자체가 산출하지 않는 내용과 결론들은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와 방법론 채택과 특별한 연관성을 갖는 내용은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를 밝히는데 상당수의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13세기에서 17세기까지 신학자들이 채택한 스콜라적 방법을 대충만 훓어 보아도 스콜라주의가 특정한 교리적 결론들, 특별히 칼빈주의자들과 대립되는 칼빈학파가 내세우는 주장들 속에 담긴 그런 결론들을 산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으며, 이는 인문주의 문제에 대해서도 동일한 논지를 펼칠 수 있다. 스콜라적 접근법의 채택은 예정론 사상이나 신인 협동설로 귀결되지 않았다. 같은 맥락에서, 아스리스토텔레스의 사중적 인과율 사용도 형이상학 관심사를 촉발하지 않았으며 형이상학 결정론은 더더욱 그러하다. 인문주의는 신학에 있어서 언약적 강조점을 초래하지 않았다. 칼빈을 분할하되 그의 예정론을 스콜라적 성향과 연결하고 그의 언약론을 인문주의 훈련과 연관짓는 것은 얼마나 궁색하고 역사 기만적인 처사인가! 개혁주의 전통을 제한속죄 가르치는 스콜라적 예정론 학자들과 가정적 보편주의 가르치는 보다 친절하고 온화한 인문주의 학자들로 분할하는 것도 동일하게 궁색하고 역사를 기만한다. (아마도 우리는 철학적 결정론을 주장했던 두 명의 인문주의 학자들, 피에트로 폼포나찌(Pietro Pomponazzi) 및 로렌쪼 밸라(Lorenzo Valla), 신인 협동설적 유형의 신학을 내세웠던 가브리엘 비엘(Gabriel Biel), 루이스 몰리나(Louis Molina), 제이콥 알미니우스(Jacob Arminius) 같은 스콜라적 학자들을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스콜라적 방법 혹은 인문주의 방법의 요소들을 가졌다는 사실은 16세기와 17세기 인물들이 특정한 예정론 혹은 언약론을 주장하게 된 이유가 되지 않았으며, 어떤 신학자가 작정의 전택설적 입장을 취할 것인지 혹은 후택설적 입장을 취할 것인지에 대한 교리적 체계화 속에서의 미묘한 교리적 차이에 대해서도 원인을 제공하지 않았다.

방법론이 어떤 종류의 내용에 책임을 져야만 하는가? 그 시대의 인물들이 일관되게 스콜라적 방법과 대중적, 교리문답적, 혹은 주석적 방법들 사이 및 종합적인 방법과 분석적인 방법들 사이를 구분한 것을 고려할 때, 방법은 문헌의 내용에 영향을 주기는 하되 논증의 정밀도, 형태, 종류, 어떤 주제들은 다루고 어떤 주제들은 생략해야 하는지의 여부, 주제들의 순서와 배열 등과 관련된 것이다. 예를 들어 칼빈주의자들과 대립되는 칼빈학파의 중심적인 요소로서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서 발견되는 예정의 후험적(a posteriori) 혹은 분석적(analytic) 위치는 17세기의 많은 신학적 체계에서 보여지는 선험적(a priori) 혹은 종합적(synthetic) 위치와는 대조적인 것이지만 개념에 있어서의 차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예정론적 시스템의 발전과도 무관한 것임을 확인시켜 줄 수 있다. 오히려 예정론의 위치 문제는 신학을 구성하고 가르치는 여러 방법들과 관련된 논증의 다양한 순서와 전적으로 관계된 것이다. 근대 초기의 인물들은 스콜라적 배열, 교리문답 배열, 신조적 배열의 용법을 알았으며, 스콜라적 모델의 경우에는 다소 인과적인 순서를 따르고 교리문답 경우에는 보다 분석적인 바울적순서를 따른다는 함의까지 이해하고 있었다. 그 시대의 신학자는 신학적 내용이나 어떤 교리의 함의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바꾸지 않고서도 방법론에 기초하여 위치를 변경하고 주제의 범위와 세목들을 줄이거나 어떤 주제는 완전히 제거할 수 있었다.[37]

스콜라적 설명은 분명히 단정적일 것이며, 명료하고 명제적인 개념들 또는 결론들을 확립하고 문제를 논리적인 방식으로 제기하고 논증하고 풀어가긴 하지만 제기된 문제들 혹은 도달한 결론들을 좌우하진 않는다. 인문주의 모델이 제공하는 설명은 보다 추론적인 것이며, 증명의 논리와는 구별되는 수사 혹은 설득을 지향하며, 그렇다고 그런 방식이 논증의 내용이나 해당 주제들을 임의로 주관하는 것은 아니다.

3. 문맥이 고려된 개혁파 개신교의 지성사

칼빈과 칼빈주의 주제에 대한 최근 논의에서 등장한 멀러 논제(Muller-Thesis)’에 대해 한 마디 추가하려 한다. 그 용어는 내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며, 지금 설명하고 있는 이곳 이외에 나 자신의 다른 어떤 글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용어이다.[38] 나는 근대 초기 개혁주의 신학의 발전에 대한 재해석 및 재평가와 관련된 논증들을 단일한 논제로 축소하는 것은 대단히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특별히 그 논제가 단순히 종교 개혁자들과 개혁파 정통주의 인물들 사이의 연속성 주장인 것처럼 간주될 경우와, 재평가가 연속성과 불연속성논의로 축소되거나 칼빈의 사상과 이후 개혁주의 인물들의 사상에 어떤 교의학적 일치가 있는지를 살피는 쪽으로 축소될 경우에도 문제가 된다.

칼빈의 가르침과 이후의 개혁주의 전통에 속한 어떤 신학자의 교리적 체계화 사이의 일치성에 관한 어떤 교의학적 주장을 위해 그 논제에 호소하는 자들과 그 둘의 차별성을 강조하기 위해 그 논제를 비난하는 자들이 환원주의 논법의 협소한 세계에 머물러 있는 한, 논쟁의 두 당사자는 역사적 논의에 어떠한 면에서도 기여하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그러한 주장들이 칼빈과 칼빈주의자들사이의 연속성 혹은 불연속성에 대한 (극도로 단순화된) 환원주의 표상에 의존하고 있다면, 연속성에 호의적인 입장을 가진 측에서 제시한 증거는 종교개혁 이후의 개혁파 정통주의 발전을 분석하는 작업에 보탬이 되지 않을 것이며, 연속성을 반대하기 위해 제시된 증거도 고백적 개혁주의 전통과 신학의 근대 초기적 발전에 대한 재평가 작업에 속하는 실제적인 제안들에 찬동하건 반대하건 그러한 논의와는 아무런 연관성도 없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종교개혁 시대와 정통주의 시대 사이의 관계성에 대한 재평가는 (최소한 나의 접근법에 있어서 만큼은) 칼빈 및 그의 동시대 인물들의 시대와 이후 개혁파 정통주의 시대 사이의 연속성을 주장하되 변화와 발전이 수반되지 않은 연속성은 주장하지 않았다. 또한 그 재평가는 이후의 개혁주의 인물들이 칼빈의 사상 혹은 초기의 다른 종교 개혁자들 사상을 수용하되 획일적인 방식으로 수용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재평가 혹은 재심사의 방법은 근대 초기 개혁주의 전통의 방대함과 다양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이는 개혁주의 전통의 신앙 고백적 문헌들이 산출되고 그 신앙 고백적 울타리를 인지하며 이루어진 신학의 보다 정밀한 설명이 형성된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런 접근법은 칼빈 혹은다른 어떤 종교 개혁자를 그 전통의 규범적인 대변자로 만들지 않으며, 교리적 체계화의 다양한 자료들과 배경들과 환경들을 존중하며, 근대 초기 당시의 기준을 따라 정통주의 문제를 풀어가되 개혁주의 인물들이 개입한 많은 논쟁들이 서로를 없애려는 경향을 보이지 않았으며 이단들을 확정하고 새로운 신앙 고백적 문헌들을 마련하는 일에는 관여하지 않았음을 인지하고 있다.[39]

내가 볼 때에, 종교개혁 이후의 개혁주의 신학 해석의 전반을 모두 아우르는 단일한 논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교리적 연속성 혹은 불연속성 이론도 그 모두를 포괄하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오히려 학자적 논의의 역사를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아니면 혼합적으로든 반영하는 다양한 전제들 혹은 해석들이 있으며, 그것들 중 일부는 나 자신의 결론이고 다른 일부는 내가 연구하는 중에 계속 대화의 상대로 삼았던 기존의 학문연구 일반에서 취한 결론이다.[40] 그리고 나의 『종교개혁 이후의 개혁주의 교의학(Post-Reformation Reformed Dogmatics)』과 다른 부수적인 논문들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 개별적인 주제들 및 사안들과 관련하여 만들어진 주장에 속하는 일련의 하부 논제들도 있다. 20세기의 주된 학문연구 흐름에서 연속성-불연속성 논제를 긍정적인 태도로 수용한 대표적인 사례는, 스콜라주의와 인문주의를 주로 방법론과 관계된 것으로 규정하되 비록 그것들이 내용에 미묘한 방식으로 영향을 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용 자체나 도출되는 결론들을 직접 결정짓는 것은 아니라고 이해한 것이다. ‘멀러 논제에 호소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 것 같지만, 나는 그것을 내가 생각해낸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나의 인용들은 수십년간 이러한 이해를 주장하고 입증한 중세 및 르네상스 분야의 거대한 학문연구 집단이 있음을 일관되게 보여주고 있다.[41] 이 부분에 있어서 내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공적이 있다면, 칼빈주의 문제를 다루는 현대 학자들로 하여금 칼빈과 16-17세기의 다른 개혁주의 학자들의 배경을 이해하는 지평을 넓히려는 시도와 그들의 참고문헌 목록을 확장하되 대단히 비판하고 있지만 읽지는 않았던 16세기 후반과 17세기 개혁주의 인물들 뿐만 아니라 현대 학자들이 애써 참조하려 하지 않았던 스콜라주의 및 인문주의 본질을 다루는 방대한 학문연구 일반까지 넓히려고 한 노력에 있다.

이와 유사하게 칼빈을 규정하되 비록 개혁주의 전통의 발전에 영향을 주기는 하였지만 정통주의 시대의 인물들이 그들의 유일한 규범적 선행자로 여기거나 개혁주의 신앙의 체계를 세운 창립자로 여기지는 않았던 종교개혁 운동을 집대성한 2세대그룹 중의 한 사람으로 규정하는 것은 결코 생소한 발상이 아니다. 이런 학문연구 흐름에 정통하지 않은 사람만이 새롭다고 느낄 것이며 종교개혁 역사를 모르는 자만이 새로운 발상이라 여길 것이다.[42] 라인홀드 제베르그(Reinhold Seeberg)는 이렇게 설명한다.

칼빈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그가 이 위대한 시기의 2세대 중의 한 사람이란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는 전통을 통하여 자신의 사상들과 행위의 강령을 받아 들였으며, 대단히 온전한 형태로 담아냈다. 신학에 있어서나 교회에 있어서나 완성하고 조직하는 것은 칼빈의 일이었다.[43]

이와 유사하게 조지 파크 피셔(George Park Fisher)와 존 멕닐(John T. McNeill)도 칼빈을 종교개혁 2세대에 속하였고 그것의 집대성과 체계화에 힘쓴 인물로 규정한다.[44] 이는 윌러스틴 워커(Williston Walker)도 동일하게 주장하는 것이다.

칼빈은 2세대 종교 개혁자들 중에 속한다. 그의 연대기적 및 신학적 위치는 종교개혁 창시자들 중에 속하지 않고 그것을 계승한 자들 중에 있다.[45]

학문연구 일반은 17세기의 개혁주의 인물들이 칼빈을 종교개혁 2세대의 문맥에 배치시킨 것과 칼빈의 사상을 개혁주의 전통의 규범으로 이해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았다. 이것은 페리 밀러(Perry Miller)가 뉴잉글랜드 청교도 신학과 관련해서 명료하게 진술했다. 청교도는 칼빈을 그들의 사상의 원천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자신들을 칼빈이 창시자로 있는 무리들의 일원으로 여기지도 않았다고 밀러는 설명한다.[46]

나의 논증에서 나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는 다른 사례는 다음과 같은 주장이다.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 인물들의 문헌에서 발견되는 믿음과 이성의 관계성 및 신학과 철학의 관계성에 대한 입장이 (비쩌와 키켈의 입장과는 반대되는 것으로서) 일종의 합리론도 아니고 합리론 및 근대 초기 합리론의 본질과 특성으로 도약하는 발판도 아니라는 것이다.[47] 이것은 나 자신의 논지라고 주장하기 힘들다. 신학계 안에는 합리론의 등장을 퇴조하는 개신교 스콜라주의에 대한 반작용의 일환으로 이해했던 기존의 여러 합리론 관련 해석들이 있었다.[48] 더욱이17세기의 보다 전통적인 기독교적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철학사의 주된 흐름에서 등장한 새로운 합리론들 사이의 차이들에 대한 일관된 인식이 이미 있었듯이,[49] 신학과 철학의 역사 속에서 계시와 이성의 다양한 관계들에 대해 중요한 논의가 이미 있었으며, 그 논의는 중세의 스콜라주의에 관해서도 대단히 동일한 논지를 끌어낸 바 있다.[50] 그리고 베자와 오웬 같은 인물들의 문헌에서 합리론의 형태가 아니라 믿음과 이성의 전통적인 조화가 있다는 결론을 이끌어낸 개혁파 정통주의 연구도 최근에 있었다.[51]

이러한 여러 논제들 혹은 전제들의 적용에서 등장하게 된 종교개혁 이후의 개신교 논의 및 분석 방법론은 발전하는 개혁주의 전통에 내재하는 관점의 다양성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 시대의 개신교 사상과 정통주의 시대의 개신교 사상 사이에서 확인할 수 있는 다양한 관계성도 존중하고 있다. 발전과 다양성의 이유는 특별히 관심의 초점이 하나의 신학적 문제에서 다른 문제로 이동하고 문맥들과 논쟁들도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실제로 연속성과 불연속성개념 혹은 변화되는 환경을 따라 이루어진 신학적 접근법의 발전, 정교화, 개선이란 차원에서 이해된 연속성 개념은 칼빈주의자들과 대립되는 칼빈학파 뿐만 아니라 중세의 스콜라 신학과 종교개혁 신학 사이의 극단적인 단절을 옹호하는 자들에 의해서도 주장된 극단적 불연속의 단순한 책략에 대한 대응이지 탐구의 주된 초점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사안의 핵심은 한 신학자의 관점과 다른 신학자의 관점 사이의 연속 혹은 불연속을 밝히거나 주장하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어떤 특정한 신학자를 이해하되 그의 문맥 뿐만 아니라 사상의 다양한 궤적들 혹은 전통들과 관련해서 그가 처한 위치를 규명하는 것이다.[52] 게다가 이러한 궤적들 혹은 전통들은 종교개혁 시대의 논쟁들을 통하여 전수되거나 도출된 논점들과 교리적 체계화 뿐만 아니라 교부들과 중세의 배경에서 도출된 주석들과 도식들과 논점들을 수용하고 활용함에 있어서 나타난 대단히 복잡한 유형들을 포함하고 있다.

다른 방식으로 말하면, 교리적 주장에 대한 칼빈의 체계화와 이후의 개혁주의 인물들이 제공하는 체계화들 사이의 차이점을 규명하는 것은 재평가의 (연속성) 주장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도 아니고 칼빈의 개념들이 그것들을 구체화한 17세기 후반기에 개혁주의 사상의 권위 있는 자료로 인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묵살하는 것도 아니다. ‘연속과 불연속은 함축적인 용어로서 중세적 표상에 따르면 대개 어거스틴 구원론의 전통이라 불리우고 종교개혁 및 종교개혁 이후의 표상에 따르면 발전하는 개혁주의 전통으로 불리우는 울타리 안에서 논증의 보다 광범위한 서술에 적용되는 개념이다. ‘칼빈주의자들과 대립되는 칼빈접근법을 거절하는 연속과 불연속논제는 그 접근법과 동일하게 그릇된 칼빈주의자들을 위한 칼빈접근법을 가지고 그 거절의 빈자리를 매우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논제는 칼빈을 개혁주의 전통의 창시자나 유일한 편찬자로 규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개혁주의 전통을 제한적인 의미의 칼빈주의 전통으로 규정하는 것에도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개혁파 정통주의 재평가의 역사적 전제들 중 하나는 칼빈이 개혁주의 전통을 고안하지 않았으며 그것의 유일한 2세대 편찬자도 아니라는 것이다. 특별히 칼빈의 작업은 쯔빙글리, 부써, 오클람파디우스와 같은 종교 개혁자들과 더불어 시작된 개혁주의 전통의 발전으로 간주되지 않으면 안되고, 그 전통의 신앙 고백적 교의적 체계화를 향해 칼빈의 동시대 인물들(불링거, 버미글리, 비레, 무스쿨루스, 히페라우스, 아 라스코 등)이 이룩한 업적들 중의 (비록 중요한 공적이라 할 수 있겠으나) 하나로 이해되지 않으면 안된다. 게다가 이런 논지는 칼빈을 개혁주의 전통의 창시자요 규범으로 보는 교의학적규정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개혁주의 사상의 유형들과 궤적들에 대한 탐구, 특별히 16세기 초반의 종교 개혁자들 사상을 이후 세대들의 개혁주의 인물들이 수용한 것에 대한 탐구에 의존하여 얻은 역사적인결론이다.[53] 칼빈이 개혁주의 전통의 설립자도 아니고 유일한 계승자도 아니라는 것은 분명한 역사적 소여이다. 칼빈과 다른 종교 개혁자들 사이에 교환한 서신은 이 사실을 분명히 증거하고 있으며, 칼빈 자신의 시대이든 후기 인물을 통해서든 개혁주의 전통의 발전에 기여한 대단히 많은 사례들이 있으며 칼빈의 공헌은 그것들 중에서 결코 종결자가 아니었다.[54]

어떤 사람은 칼빈에게 사실과는 달리 규범적인 지위를 부여하고, 확인 가능한 신앙 고백적 전통 내에서의 기초적 교리의 광범위한 연속성을 무시하며 칼빈을 칼빈주의자들과 대립되는 것처럼 설정할 수 있다. 어떤 이는 칼빈의 사상에 스콜라적 배경과 스콜라적 요소들이 있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있고 또한 17세기 개혁주의 인물들에 의해 쓰여진 비스콜라적 신학 문헌들이 대단히 많다는 것도 부인하고, 나아가 방법이 내용에 영향을 주는 것은 사실이나 방법이 칼빈주의자들과 대립되는 칼빈학파들에 의해 가정된 그런 종류의 영향을 주었거나 그런 종류의 결론들을 강요한 것은 아니라는 지극히 타당한 논지도 거부할 수 있겠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이러한 내용들을 무시하며 동시에 칼빈의 신학과 17세기 스콜라적 방법론을 대립적인 것으로 설정할 수 있고 유의미한 문헌적 증거도 제시하지 않으면서 무조건 스콜라적 방법과 정통주의 교리의 구분은 적합하지 않으며 후기 개혁주의 인물들의 교리들과 교리적 강조점은 그들의 스콜라주의 때문에 칼빈의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할 수 있겠다.

어떤 사람은19세기 혹은 20세기적 신학 접근법을 지지하듯 칼빈을 그의 배경과 문맥에서 분리하여 이해할 수 있겠고, 그래서 칼빈은 좋은 신학을 남겼지만 다른 사람들은 칼빈 신학의 균형을 뒤틀어 버렸다는 주장에 기초하여 스스로를 그 전통의 한 (대체로 스콜라적혹은 정통주의’) 부분에서 분리하기 위해 칼빈의 사상을 칼빈이 한 부분으로 참여하고 있는 전통에서 분리시킬 수도 있겠다. 이 모든 것들은 오늘날의 신학을 위하여 좋고 균형이 있으나 대단히 시대 착오적인칼빈주의 모델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이것은 올바른 역사서술 방식이 아니며 등급 신학화(rank theologism)일 뿐이다.

칼빈과 개혁주의 전통에 대한 재평가는 칼빈과 그의 동시대 인물들 안에서 규명될 수 있는 교리적 체계의 차이들이 개혁주의 사상의 후기 역사로 흡수가 되었으며, 발전적인 개혁주의 전통의 특징적인 이슈들, 특별히 전택설과 후택설 및 가정적 보편주의 논쟁과 같은 사안들에 있어서 그 시대의 신학자들 사이에는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 시대와 이후 개혁주의 사상의 궤적 속에서 확인되는 다양한 시대들 사이에도 교리적 체계의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다.

이와 유사하게 그 재평가는 2세대 종교 개혁자들 시대에 상대적인 신앙 고백적 한계들을 설정했고 계속 논의하되 정통주의 시대에 때로는 그 한계들을 엄밀하게 정하였고 때로는 느슨한 상태로 내버려 두었던 그런 개혁주의 전통들이 있다고 주장한다. 주석적인 사안이든, 교리적인 사안이든, 변증적인 사안이든, 철학적인 사안이든, 개혁주의 전통 내에서도 논증의 광범위한 흐름들이 있고 그 흐름들의 다양한 대표적 인물들이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면, 다른 주제들과 사안들에 대해서도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전승과 발전의 다른 유형들 및 다양한 연속과 불연속이 드러날 것이다. 신학서론 관련 주제들, 성경의 해석 및 교리적 이해,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 및 삼위일체 교리 등과 관련해서 이미 밝혀진 발전들은 모두 다양한 궤적들의 존재를 입증하고 있으며, 또한 그 모든 발전들은 교리적 체계화에 있어서도 유의미한 다양성을 증거하되 논증의 어떤 부분은 칼빈의 논증과 유사하고, 어떤 부분은 불링거의 견해와 유사하고, 어떤 것들은 버미글리 관점과 유사하며, 논증의 다른 부분들은 이전의 신학적 철학적 전통에서 발견되는 논증의 계보를 수용하되 어떤 경우에는 종교 개혁자들 사상을 통하여 중개된 것이며 어떤 것들은 그렇지 않음을 증거하고 있다.

재평가를 떠받치는 핵심적인 근간들은 결코 칼빈과 이후의 칼빈주의자들사이의 단순한 연속성 혹은 불연속성 문제를 중심으로 구성되지 않았다. 사실 연속성-불연속성 문제는 주로 데오도르 베자가 칼빈 신학의 균형을 뒤틀어 버렸다는 가정에 근거하여 칼빈주의자들과 대립되는 칼빈학파가 제기했던 중심적인 문제였다. 즉 칼빈은 개혁주의 전통 전체의 규범을 제공했고 베자는 그러한 칼빈의 신학을 훼손하며 예정론적 시스템 혹은 예정론적 형이상학 신학을 생산했고 이것은 칼빈의 신학이 아니라 베자의 신학을 재생산한 모든 칼빈주의자들에 의해 전수된 것이라고 했다.[55] 물론 잔키우스 또한 지극히 동일한 결과를 산출한 문제의 원흉으로 지목될 수 있겠다.[56] 이처럼 칼빈주의자들과 대립되는 칼빈주장은 현대의 신학적 체계들과 같이 16-17세기 신학들도 중심교리 혹은 중심적인 동기를 중심으로 하나의 체계 혹은 통일성을 이루었고 이후의 개혁주의 전통은 (그리스도 중심성이든 그리스도 연합이든 간에)칼빈 자신의 중심적인 교리를 제대로 전수하지 못했다는 가정에 기초한 극단적인 불연속성 이론이다.[57]

다양하게 발전한 개혁주의 전통 내에 연속성이 있다는 주장은 이러한 칼빈주의자들과 대립되는 칼빈이론의 단순한 반전이 아니다. 그 이론을 반박함에 있어서 이 새로운 접근법은 신학의 체계(body)’를 구성하는 일련의 서로 독립적인 교리적 주제들에 의해 특징지어 지는 로쿠스 방법론(locus method) 때문에 단일한 중심교리 개념을 거부한다. 또한 그것은 시대 착오적인 시스템(system)’ 개념을 적용하는 것과 칼빈의 사상 혹은 근대 초기 신학자들 사상을 해석하되 그들의 어떠한 문헌들도 증거하지 않는 강제로 주입된 통일성(coherence)이란 개념의 틀로 해석하는 것을 반박한다. 중심적인 교리는 애초부터 없었기 때문에 하나의 중심적인 교리에서 다른 중심적인 교리로의 이동도 없었다.

게다가 나 자신의 논증은 일관되게 칼빈주의자라는 용어 사용을 피하였다. 이는 그런 용어사용 자체가 편견을 조장하기 때문이며, 칼빈 이후의 개혁주의 인물들은 자신을 칼빈주의자로 혹은 칼빈만(Calvinus solus)의 추종자로 규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들은 어떤 신학자를 개혁주의 전통의 창시자, 저자, 혹은 주도적인 지도자로 여기기를 꺼려 했다.[58] 달리 말하면, 16세기 후반과 17세기의 개혁주의 전통은 결단코 칼빈의 신학을 일종의 교의학적 규범으로 여겨서 그것에 제한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전통은 16세기의 종교개혁 1세대와 2세대의 핵심적인 인물들의 작업에 기초한 신앙 고백적 운동이며, 칼빈의 『기독교 강요』와 불링거의 『교의학적 설교집(Decades)』 및 그 시대의 어떤 다른 문헌처럼 신학적 가르침을 제공하는 하나의 특정한 책을 표준으로 삼아 규정되는 전통이 아니라 서로 느슨하게 관련된 국가별 및 지역별 고백서와 교리문답 등에 의해서 확인되는 그런 전통이다. 보다 정교한 신학적 체계들이 제공하는 많은 세목들을 고의로 제거한 교리의 포괄적인 진술이란 신앙 고백서의 특성이 암시하듯, 개혁주의 전통에 대한 그런 신앙 고백적 이해는 주석의 다양한 결과들과 교의학적 혹은 교리적 문헌들의 다양한 체계들을 염두하지 않으면 안된다. 처음부터 논증의 근원적인 요소들은 전통적인 문맥, (‘칼빈주의보다) 개혁주의 전통의 상대적인 넓이, 그에 버금가는 고백적 범위의 포괄성 및 제한성 등인데, 이 고백적 범위는 종교 개혁자들(주로 종교개혁 2세대)이 확립했고 이후 세대의 개신교 학자들이 변증해 온 것이다.

재평가의 특성과 방향은 또한 칼빈 이후의 개혁주의 진영의 타락전 선택설과 타락후 선택설 논쟁과 자유선택 문제의 미세하게 차별화된 논의와 가정적 보편주의 문제의 발전을 통해서도 확인될 수 있다. 첫째 전택설과 후택설 문제에 대한 17세기 논쟁들이 선택 및 유기와 관련된 신적인 의지의 대상을 규명하는 것과 관계되어 있고 영원한 작정에 있어서 우선순위 정하는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고 할 때, 우리는 17세기에 체계화된 교리의 정밀한 내용들에 선행하는 동일한 요소가 종교개혁 1세대와 2세대의 사상에는 거의 없으며 우르시누스, 베자, 잔키우스 같은 초기의 주요 정통주의 인물들 중 첫번째 그룹에 속하는 자들의 문헌 속에도 그리 많지 않음을 확인한다. 물론 인류의 정죄된 자들(condemned mass)’ 중에서 얼마를 선택한 것에 대한 일관된 언급들이 초기 개혁주의 인물들의 문헌에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비록 선택과 유기, 창조, 혹은 타락과 관련된 작정의 순서에 대한 물음이 수반되는 것은 아니지만 특별히 17세기 학자들의 후택설적 입장에 대해서는 분명한 선행적 요소가 있다고 하겠다. 또한 타락을 신적인 작정에 포함시킬 것이냐에 대한 사안에 있어서 칼빈과 불링거 사이의 불일치를 지적하긴 하지만 순서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근대 초기의 개혁주의 견해들도 있다.

두번째 자유선택 문제에 대해서는, 칼빈이 주장하는 논증이 죄 아래 있는 인간의 무능력 문제를 겨냥한 것이었고 인간의 자유에 대한 보다 포괄적인 물음으로 전개되진 않았기 때문에 칼빈이 그 이후의 교리적 체계화에 끼친 영향이 상대적으로 작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근대 초기 개혁주의 사상에 대한 중요한 재평가가 있었다.[59] 최근의 연구들은 개혁주의 인물들의 스콜라적 논의에 대해 토마스 학파와 스코투스 학파를 모두 포함하는 중세적 뿌리가 있음을 주장하고 있으며, 버미글리 및 잔키우스 같은 인물들을 거쳐 유니우스, 고마루스, 푸치우스 (이 세명은 전택설 옹호자들) 및 튜레틴 같은 이후의 개혁주의 학자들로 이어지는 발전의 계보도 규명해 주고 있다. ‘칼빈주의자들과 대립되는 칼빈이론을 지지하는 자들에게 놀라움을 가져다 준 것이 있다. 즉 은혜로운 예정과 오직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 주장의 길을 제공하고 이와 동시에 결정론을 피하고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과 인간의 책임에 대한 긍정적인 주장을 제공한 것은 칼빈이 아니라 바로 칼빈 이후의 전택설 지지자를 포함하는 개혁주의 전통이란 사실이다. 비록 칼빈 자신이 그런 논지를 확증하고 있기는 하지만 명료한 체계화를 확립한 것은 아니었다.

가정적 보편설과 제한속죄 문제도 칼빈주의자들과 대립되는 칼빈칼빈주의자들을 위한 칼빈관점들과 구별되는 나 자신의 논법의 방향을 예증하는 아주 유용한 사례를 제공하고 있다. 칼빈이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 삐에르 드물랑(Pierre Du Moulin), 프란시스 튜레틴(Francis Turretin)과 같은 칼빈주의자들입장과 일치하는 제한적인 속죄혹은 특별한 구속을 가르친 것으로 해석하는 다량의 연구 문헌들이 있다. 또한 칼빈을 무제한적 속죄혹은 우주적인 구속가르친 인물로 해석하며 그의 신학을 모이세 아미로(Moyses Amyraut)의 신학과 연결하고 결국 칼빈과 칼빈주의자들사이의 불연속을 주장하는 정반대의 입장을 고수하는 동일한 분량의 문헌들도 있다.[60]

칼빈의 그리스도 사역론과 아미로의 가정적 보편주의 사이의 유의미한 단절이 칼빈주의자들을 위한 칼빈해법에 고유한 요소이듯, 그 둘 사이의 긍정적인 관계성은 칼빈주의자들과 대립되는 칼빈해법의 근원적인 요소이다. 하지만 발전적인 개혁주의 사상을 다채로운 전통으로 이해하는 재평가는 그 관계성 문제를 풀기 위한 두 해법들 중 어떠한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다.[61] 전택설과 후택설 경우처럼, 종교개혁 1세대와 2세대 인물들 중에 쯔빙글리, 부써, 칼빈, 불링거, 무스쿨루스, 버미글리 등의 신학에는 종교개혁 고백서들 및 교리문답 문헌들 안에서 규정되고,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 논쟁들을 성립시킨 교리적 체계라는 울타리 내에 포함되어 있으며, 후기 개혁주의 신학에서 발견되는 교리적 체계의 다양성을 지향하는 그런 요소들이 있다. 게다가 가정적 보편설의 여러 16-17세기 유형들이 신앙 고백적 울타리 안에서 발견되고 개혁파 정통주의 인물들 중에 교리적 체계의 다양성이 있다는 것을 보건대,[62] 특정한 교리적 이슈들에 있어서 칼빈의 교리적 도식들이 아미로, 투레틴, 오웬, 코케이우스 및 푸치우스 중에서 누구를 지원하고 있는지 그 방향을 확인하는 것은 비록 어느 정도 가치를 가지기는 하지만 그런 확인이 보다 광범위한 전통적 발전의 연속성에 대한 기본적인 주장에 변경을 가하는 것은 아니다. 아미로의 신학이 고유하게 칼빈주의 전통을 대표하고 있다는 과도하게 단순화된 주장이 오류인 것처럼, 오웬과 투레틴 같은 개혁주의 학자들이 마치 베자를 포함한 신학자들 개개인의 신학 사이에 유사성과 차이성이 공존하고 있지 않기나 한 것처럼 오직 베자만의 신학적 궤적을 따른다고 주장하는 것 또한 동일하게 지나친 단순화의 오류이다.[63] 만약 칼빈 자신의 가르침이 유일한 칼빈주의표준이라 한다면, 17세기 논쟁에서 아미랄드 학자이든 그를 반대하는 학자이든, 코케이우스 학자이든 그를 반대하는 학자이든 각 당사자들 모두는 변질된 칼빈주의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17세기의 어떤 논쟁 당사자도 칼빈이 주장한 것을 정확하게 반복하진 않았으며 논쟁의 당사자들 모두는 칼빈이 처한 문맥과는 다른 자기들의 문맥 속에서 자기들의 신학적 체계를 논하였고, 또한 실제로 그들은 모두 칼빈이 제공했던 (가정적 보편설에 있어서는 베자가 제공했던) 것보다 더 정교하게 다듬어진 개념을 요구하는 논지들을 펼쳤기 때문이다.



[1] John T. McNeill, The History and Character of Calvinism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54), p. viii.
[2] The following essay uses the term “master narrative” rather than its near-synonyms, “grand narrative” and “metanarrative,” given the association particularly of the latter term with an unspoken or untold narrative that unifies an entire cultural perspective or world-view — while master narrative can be identified somewhat less philosophically as an actual narrative designed to give sequence and cohesion to a series of lesser narratives concerned with more particularized contexts. The foundation of such master narratives will, typically, be an anachronistic assumption drawn from the philosophical and/or theological views of the writer rather than from the materials used to construct the historical narrative.
[3] Alexander Schweizer, Die Glaubenslehre der evangelisch-reformirten Kirche dargestellt und aus den Quellen belegt, 2 vols. (Zürich, 1844-1847); idem, Die protestantischen Centraldogmen in ihrer Entwicklung innerhalb der reformierten Kirche, 2 vols. (Zürich, 1854-1856); Heinrich Heppe, “Der Charakter der deutsch-reformirten Kirche und das Verhältniss derselben zum Luthertum und zum Calvinismus,” in Theologische Studien und Kritiken, 1850 (Heft 3), pp. 669-706; idem, Die Dogmatik der evangelisch-reformierten Kirche (Elberfeld: R. L. Friedrichs, 1861).
[4] George Park Fisher, History of Christian Doctrine (New York: Scribner’s, 1901), pp. 347-348; more recently, Leonard Trinterud, “The Origins of Puritanism,” in Church History, 20 (1951), pp. 37-57; Jürgen Moltmann, Gnadenbund und Gnadenwahl: Die Prädestinationslehre des Moyses Amyraut, dargestellt im Zusammenhang der heilsgeschichtlich-foederaltheologie Tradition der Akademie von Saumur (Göttingen, 1951); Richard Greaves, “The Origins and Early Development of English Covenant Thought,” in The Historian, 31/1 (1968), pp. 21-35; and J. Wayne Baker, Heinrich Bullinger and the Covenant: The Other Reformed Tradition (Athens, Ohio, 1980).
[5] E.g., Basil Hall, “Calvin Against the Calvinists,” in John Calvin: A Collection of Distinguished Essays, ed. Gervase Duffield (Grand Rapids: Eerdmans, 1966), pp. 19-37; Wilhelm Niesel, The Theology of Calvin, trans. Harold Knight (London: Lutterworth, 1956); Brian Armstrong, Calvinism and the Amyraut Heresy Protestant Scholasticism and Humanism in Seventeenth Century France (Madison: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1969); Alister McGrath, A Life of Calvin (Oxford: Blackwell, 1990).
[6] As found in standard manuals that were highly influential in the late nineteenth and early twentieth centuries, highly influential in framing the understanding of Protestant scholasticism in nineteenth- and twentieth-century theological discussion: e.g., Friedrich Ueberweg, Grundriss der Geschichte der Philosophie von Thales bis auf die Gegenwart, 2nd ed., 3 vols. (Berlin: E. S. Mittler & Sohn, 1865-1866); in translation, A History of Philosophy, from Thales to the Present Time, trans. from the 4th German edition by George S. Morris, with additions, by Noah Porter, 2 vols. (New York: C. Scribner & Company, 1872-1874); and Johann Eduard Erdmann, Grundriss der Geschichte der Philosophie, 2 vols. (Berlin: W. Hertz, 1869); in translation, A History of Philosophy, ed. Williston S. Hough, 2nd ed., 3 vols. (London: S. Sonnenschein & Co.; New York, Macmillan & Co., 1890-1892).
[7] Thus, Amand Saintes, Histoire critique du rationalisme en Allemagne depius son origine jusqu’à nos jours (Paris and Leipzig: Jules Renouard, 1844); and Robertson, John M. A History of Freethought, Ancient and Modern, 2nd ed., 2 vols. (London: Watts & Co., 1906).
[8] Cf. Friedrich August Tholuck, Vorgeschichte des Rationalismus, 4 vols. (Halle: E. Anton, 1853-1862); also note John Dillenberger, Protestant Thought and Natural Science: a Historical Interpretation (Nashville and New York: Abingdon, 1960).
[9] Evident in Armstrong, Calvinism and the Amyraut Heresy, pp. ***; Jack B. Rogers and Donald K. McKim, The Authority and Interpretation of the Bible: an Historical Approach (San Francisco: Harper and Row, 1979), pp. 47, 75-76, 149-150, 160-169,175, 185-188, 221-223, etc.
[10] Thus, Hans Emil Weber, Reformation, Orthodoxie und Rationalismus, 2 vols. in 3 parts (Gütersloh, 1937-51; repr. Darmstadt: Wissenschaftliche Buchgesellschaft, 1966); and Ernst Bizer, Frühorthodoxie und Rationalismus (Zürich, 1963).
[11] Jacob Burckhardt, The Civilization of the Renaissance in Italy, trans. S. C. G. Middlemore (London: S. Sonnenschein; New York: Macmillan, 1904), p. 129.
[12] Burckhardt, The Civilization of the Renaissance in Italy, p. 203
[13] Perhaps most notably, Paul Oskar Kristeller, Renaissance Thought: The Classic, Scholastic, and Humanist Strains (New York: Harper & Row, 1961).
[14] See, e.g., David C. Steinmetz, Luther and Staupitz: An Essay in the Intellectual Origins of the Protestant Reformation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1980); Dennis Janz, Luther and Late Medieval Thomism: A Study in Theological Anthropology (Waterloo: Wilfrid Laurier University Press, 1983); and John Farthing, Thomas Aquinas and Gabriel Biel: Interpretations of St. Thomas Aquinas on the Eve of the Reformation (Durham and London: Duke University Press, 1988).
[15] Cf. John Patrick Donnelly, Calvinism and Scholasticism in Vermigli’s Doctrine of Man and Grace (Leiden: Brill, 1975); idem, “Calvinist Thomism,” in Viator, 7 (1976), pp. 441-455; and idem, “Italian Influences on the Development of Calvinist Scholasticism,” in The Sixteenth Century Journal, VII/1 (1976), pp. 81-101; with Frank A. James III, Peter Martyr Vermigli and Predestination: the Augustinian Inheritance of an Italian Reformer (Oxford: Clarendon Press;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98); and idem, De iustificatione: the Evolution of Peter Martyr Vermigli’s Doctrine of Justification (Ph.D. dissertation: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2000).
[16] Thus, e.g., Karl. Das Grundverständnis der Theologie Calvins (Neukirchen: Neukirchner Verlag, 1963); idem, Vom Scholaren bis zum jungen Reformator (Neukirchen: Neukirchner Verlag, 1981); A. N. S. Lane, John Calvin: Student of the Church Fathers (Grand Rapids: Baker, 1999), pp. 15-66, 87- 150; and Dennis Tamburello, Union with Christ: John Calvin and the Mysticism of St. Bernard (Louisville: Westminster/John Knox Press, 1994). Also note Arvin Vos, Aquinas, Calvin, and Contemporary Protestant Thought: A Critique of Protestant Views of the Thought of Thomas Aquinas (Grand Rapids: Eerdmans, 1985).
[17] See, e.g., David Bagchi, “Sic et Non: Luther and Scholasticism” in Carl Trueman and R. Scott Clark, eds., Protestant Scholasticism: Essays in Reassessment (Carlisle: Paternoster Press, 1999), pp. 3-15; David C. Steinmetz, “The Scholastic Calvin,” in ibid., pp. 16-30; and Richard A. Muller, The Unaccommodated Calvin: Studies in the Formation of a Theological Tradition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0), pp. 39-61.
[18] Cf. Stephen Ozment, “Humanism, Scholasticism, and the Intellectual Origins of the Reformation,” in F. Forrester Church and T. George Continuity and Discontinuity in Church History (Leiden: E. J. Brill, 1979), pp. ***; with Erika Rummel, The Humanist-Scholastic Debate in the Renaissance and Reformation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95), pp. 126-134.
[19] Cf. Josef Bohatec, Calvin et humanisme (Paris: Revue Historique, 1939); and idem, Budé und Calvin (Graz: Herman Bölhaus, 1950), pp 121-147; with François Wendel, Calvin et l’humanisme (Pari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1976).
[20] Bucer to Calvin, August 1549, in G. C. Gorham, Gleanings of a few scattered ears, during the period of the Reformation in England and of the times immediately succeeding; A.D. 1533 to A.D. 1588 (London: Bell and Daldy, 1857), pp. 100-104.
[21] Calvin to Vermigli (18 Jan. 1555), in CO 15, col. 388 (Select Works, VI, p. 124).
[22] Cf. Laski, Catechismus ecclesiae Emdanae, Q & R, 67, in Opera, ed. Kuyper, II, p. 530, with idem, Catechismus ecclesiae Londini, Q. 240, in ibid., II, p. 468; and note Laski to Bucer, 23 June 1545; Laski to Bullinger and Pellican, 23 March 1546, in Gorham, Gleanings, pp. 30-35.
[23] Cf. Marvin W. Anderson, “Peter Martyr, Reformed Theologian (1542-1562): His letters to Heinrich Bullinger and John Calvin,” in Sixteenth Century Journal, 4/1 (1973), pp. 41-64.
[24] Peter Martyr Vermigli, Loci communes, 2 edition ( London: nd Thomas Vautrollerius, 1583), p. 1095 (letter to Calvin); p. 1109 (letter to Beza); in translation, The Common Places of Peter Martyr. Trans. Anthony Marten. London: Henrie Denham et al., 1583), part 5, pp. 96-99, 105-106.
[25] See the documentation in Richard A. Muller, “Reception and Response: Referencing and Understanding Calvin in Post-Reformation Calvinism,” in Calvin and His Influence, 1509-2009, Proceedings of the Calvin Congress, Geneva, May, 2009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11), pp. ***.
[26] The latter phrase is taken from Michael A. Peters, Poststructuralism, Marxism, and Neoliberalism: Between Theory and Politics (Lanham: Rowan and Littlefield, 2001), p. 7.
[27] See the magisterial essay by Perez Zagorin, “Rejoinder to a Postmodernist,” in History and Theory, 39/2 (2000), pp. 201-209; responding to Keith Jenkins, “A Postmodern Reply to Perez Zagorin,” in History and Theory, 39/2 (2000), pp. 181-200; and Zagorin’s earlier essay, “History the Referent, and the Narrative: Reflections on Postmodernism Now,” in History and Theory, 38/1 (1999), pp. 1-24. Also note, Thomas L. Haskell, “Objectivity is not Neutrality: Rhetoric vs. Practice in Peter Novick’s That Noble Dream,” in History and Theory, 29/2 (1990), pp. 129-157.
[28] Cf. the various definitional statements in Richard A. Muller, Christ and the Decree: Christology and Predestination in Reformed Theology from Calvin to Perkins, reissued, with a new preface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2008), pp. ix-x, 11-12; idem, After Calvin: Studies in the Development of a Theological Tradition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3), pp. 27-33, 74-78; idem, PRRD, I, pp. 189-204.
[29] Thus, Charles Partee, Theology of John Calvin (Louisville: Westminster/John Knox Press, 2008), p. 22; cf. Myk Habets, Review of Christ and the Decree, in American Theological Inquiry, 3/2 (2010), p. 107; and note my response, “Reassessing the Relation of Reformation and Orthodoxy — A Methodological Rejoinder,” in American Theological Inquiry, 4/1 (2011), pp. 3-12.
[30] See, e.g., the definitions in G. Fritz and A. Michel, “Scholastique,” in Dictionnaire de Théologie Catholique, 14/2, col. 1691; Kristeller, Renaissance Thought, pp. pp. 92-119; David Knowles, The Evolution of Medieval Thought (New York: Vintage Books, 1962), p. 87; Armand Maurer, Medieval Philosophy (New York: Random House, 1962), p. 90; J. A. Weisheipl, “Scholastic Method,” in New Catholic Encyclopedia (New York: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 1967), XII, pp. 1145-1146; Calvin G. Normore, s.v., “Scholasticism,” in R. Audi (ed.), The Cambridge Dictionary of Philosoph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5), pp. 716-717; and Ulrich G. Leinsle, Einführung in die scholastische Theologie (Paderborn: Schöningh, 1995), pp. 5-15.
[31] Brian G. Armstrong, Calvinism and the Amyraut Heresy: Protestant Scholasticism and Humanism in Seventeenth Century France (Madison: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1969), p. 32; cf. ibid, pp. 120-121.
[32] Cf. Armstrong, Calvinism and the Amyraut Heresy, pp. 120-121; with Jürgen Moltmann, “Zur Bedeutung des Petrus Ramus für Philosophie und Theologie im Calvinismus,” in Zeitschrift für Kirchengeschichte, 68(1956-57), pp. 295-318.
[33] Armstrong, Calvinism and the Amyraut Heresy, pp. 140-141, 151; cf. Hall, “Calvin against the Calvinists,” pp. 25-28; Kendall, Calvin and English Calvinism, pp. 29-31.
[34] Cf. Armstrong, Calvinism and the Amyraut Heresy, pp. 129, 136-139; idem, Armstrong, “Duplex cognitio Dei, Or? The Problem and Relation of Structure, Form, and Purpose in Calvin's Theology,” p. 136; with Hall, “Calvin against the Calvinists,” pp. 19-20, 25-26, 28; William J. Bouwsma, John Calvin: A Sixteenth-Century Portrait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88), pp. 5, 238, note 24; and idem, “The Spirituality of John Calvin,”in Christian Spirituality: High Middle Ages and Reformation, ed. Jill Raitt (New York: Crossroad, 1987), pp. 318-319.
[35] Thus, Armstrong, Calvinism and the Amyraut Heresy, pp. 120-121, 123, 127-129, etc.
[36] Thus, Partee, Theology of John Calvin, pp. 3, 4, 25, 27.
[37] See Richard A. Muller, “The Placement of Predestination in Reformed Theology: Issue or Non-Issue” in Calvin Theological Journal, 40/2 (2005), pp. 184-210.
[38] See Martin I. Klauber, “Continuity and Discontinuity in Post-Reformation Reformed Theology: An Evaluation of the Muller Thesis,” in Journal of the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 33 (1990), pp. 467-475, for what is probably the first instance of a summary statement of the “thesis”; more recently, Thomas L. Wenger, “The New Perspective on Calvin: Responding to Recent Calvin Interpretations,” in Journal of the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 50/2 (2007), pp. 311-328; also note Habets, Review of Christ and the Decree, pp. 105-106, 107.
[39] See my essay, “Diversity in the Reformed Tradition: A Historiographical Introduction,” in Michael G. A. Haykin and Mark Jones, ed., Drawn into Controversie: Reformed Theological Diversity and Debates Within Seventeenth-Century British Puritanism (Go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2011), pp. 11-30.
[40] As, e.g, the eleven premisses presented in my essays on “Calvin and the ‘Calvinists’” in After Calvin, pp. 63-102.
[41] Thus, e.g., Armand Maurer, Medieval Philosophy (New York: Random House, 1962), p. 90; David Knowles, The Evolution of Medieval Thought (New York: Vintage Books, 1962), p. 87; J. A. Weisheipl, “Scholastic Method,” in NCE, 12, p. 1145; G. Fritz and A. Michel, “Scholastique,” in DTC, 14/2, col. 1691; Paul Oskar Kristeller, Renaissance Thought: The Classic, Scholastic, and Humanist Strains (New York: Harper & Row, 1961), pp. 92-119 with idem, “Humanism,” in The Cambridge History of Renaissance Philosophy, pp. 113-114 and with Charles B. Schmitt, Aristotle and the Renaissance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1983), pp. 24-25; Stephen Ozment, The Age of Reform, 1250-1550: An Intellectual and Religious History of Late Medieval and Reformation Europe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80), pp. 304-309.
[42] E.g., Partee, Theology of Calvin, pp. 25, 27.
[43] Reinhold Seeberg, Text-book of the History of Doctrines, trans. Charles E. Hay, 2 vols.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77), II, p. 394.
[44] George Park Fisher,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New York: Scribner’s, 1894), p. 318; John T. McNeill, The History and Character of Calvinism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54), pp. 3-4.
[45] Williston Walker, John Calvin; the Organizer of Reformed Protestantism (1509-1564), repr., with a bibliographical essay by John T, McNeill (New York: Schocken, 1969), p. 1.
46. Perry Miller, The New England Mind: the Seventeenth Century (New York: Macmillan
[46] Perry Miller, The New England Mind: the Seventeenth Century (New York: Macmillan, 1939; repr. Boston: Beacon Press, 1961), p. 93; and note Richard A. Muller, “Reception and Response,” pp. ***.
[47] See After Calvin, pp. 78-80; and PRRD, I, pp. 123-146, 388-405.
[48] E.g., Amand Saintes, A Critical History of Rationalism in Germany, from Its Origin to the Present Time (London: Simpkin, Marshall and C., 1849), pp. 90-91; John Fletcher Hurst, History of Rationalism, revised ed. (New York: Eaton & Mains, 1901), pp. 336, 339, 346-347, 349.
[49] E.g., Frederick Copleston, A History of Philosophy, 9 vols. (Westminster, Md.: Newman Press, 1946-1974; repr. Garden City: Image Books, 1985), IV, pp. 1-33; Michael Ayers, “Theories of Knowledge and Belief,” in Daniel Garber and Michael Ayers, eds., The Cambridge History of Seventeenth-Century Philosophy, 2 vol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8), II, pp. 1003-1049.
[50] E.g., Gtienne Gilson, Reason and Revelation in the Middle Ages (New York: Scribner, 1938).
[51] Jeffrey Mallinson, Faith, Reason, and Revelation in Theodore Beza, 1519-1605 (Oxford and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3); and Sebastian Rehnman, Divine Discourse: The Theological Methodology of John Owen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2002), pp. 109-128.
[52] See Carl R. Trueman, “The Reception of Calvin: Historical Considerations,” in Church History and Religious Culture, 91/1-2 (2011), pp. ***.
[53] Contra, e.g., Thomas F. Torrance, “Knowledge of God and Speech about Him according to John Calvin,” in Theology in Reconstruction (Grand Rapids, Eerdmans, 1966), p. 76; Partee, Theology of John Calvin, pp. 25-26.
[54] See my comments in “Demoting Calvin? The Issue of Calvin and the Reformed Tradition,” in Amy Burnett, ed., John Calvin: Myth and Reality: Images and Impact of Geneva’s Reformer (Eugene: Wipf & Stock, 2011), pp. 3-17.
[55] Thus, the emblematic essay of the school: Basil Hall, “Calvin Against the Calvinists,” in John Calvin: A Collection of Distinguished Essays, ed. Gervase Duffield (Grand Rapids: Eerdmans, 1966), pp. 19-37; so too, Johannes Dantine, “Das christologische Problem in Rahmen der Prädestinationslehre von Theodor Beza,” in Zeitschrift für Kirchengeschichte, 77 (1966), pp. 81-96; and idem, “Les Tabelles sur la doctrine de la prédestination par Théodore de Bèze,” in Revue de théologie et de philosophie, XVI (1966), pp. 365-377; Walter Kickel, Vernunft und Offenbarung bei Theodor Beza (Neukirchen: Neukirchner Verlag, 1967); R. T. Kendall, Calvin and English Calvinism to 1649 (New York and 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1979); and cf. Armstrong, Calvinism and the Amyraut Heresy, pp. 129-132.
[56] Otto, Gründler, Die Gotteslehre Girolami Zanchis und ihre Bedeutung für seine Lehre von der Prädestination (Neukirchen: Neukirchner Verlag, 1965); also, idem, “The Influence of Thomas Aquinas upon the Theology of Girolamo Zanchi,” in J. R. Sommerfeldt, ed., Studies in Medieval Culture (Kalamazoo: Western Michigan University Press, 1964), pp. 102-117.
[57] The latter being proposed in Charles Partee, “Calvin’s Central Dogma Again,” in Sixteenth Century Journal, 18/2 (1987), pp. 191-200; and idem, Theology of John Calvin, pp. 3, 4, 25, 27, 40-41, et passim.
[58] Thus, e.g., Andreas Rivetus, Catholicus Orthodoxus, oppositus catholico papistae (Leiden: Abraham Commelin, 1630), p. 5; Pierre DuMoulin, Esclaircissement des controverses salmuriennes (Leiden: Jean Maire, 1648), pp. 231-232; Jean Claude, Défense de la Reformation contre le livre intitulé Préjugez légitimes contre les calvinistes, 4th edition (Paris: L.-R. Delay, 1844), pp. 210-211.
[59] Thus, Willem J. van Asselt,J. Martijn Bac, and Roelf T. te Velde, trans., ed., and commentary, Reformed Thought on Freedom: The Concept of Free Choice in the History of Early-Modern Reformed Theology (Grand Rapids: Baker, 2010).
[60] See the extensive literature cited below, chapter 3.
[61] Note that the conclusions concerning this issue, drawn largely in terms of Christ’s limited intercession, in Christ and the Decree, pp. 33-35 and p. 194, notes 130 and 137, do not include any judgment on the question of whether or not Calvin’s view of Christ’s sufficiency might conduce to the view that if all would believe, all would be saved or whether it implies a prior hypothetically universal divine intention.
[62] Cf. the argument presented in PRRD, I, pp. 73-81.
[63] As, e.g., Alan Clifford, Amyraut Affirmed, or Owenism a Caricature of Calvinism: a reply to Ian Hamilton’s ‘Amyraldianism — is it Modified Calvinism’ (Norwich: Charenton Reformed Publishing, 2004), p.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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