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3일 월요일

에스더 8장을 설교하다

칼빈 신학교의 새벽기도 모임은 학생들이 스스로 정한 순번대로 돌아가며 설교한다. 오늘이 차례여서 에스더 8장을 나누었다.

특별히 고아처럼 자란 여인 에스더의 지도력을 주목했다. 당시 하만의 음흉한 계략이 빚어낸 유다인의 총학살령 공포로 하나님의 백성은 풍전등화 백척간두 운명에 처하였다. 이에 유다인 전체와 더불어 에스더는 죽기를 각오하고 왕 앞으로 나아가기 전에 금식에 돌입했다. 금식 자체가 생존보다 더 높은 가치를 추구하는 결사각오 행위이다. 에스더가 자신의 목숨보다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멸망하지 않는 것이었다. 놀라운 지도자의 덕목이다.

사태는 모르드개 사형을 집행하기 위해 세운 나무에 하만 자신이 달림으로 급격한 반전이 일어났다. 하만의 호화로운 저택은 에스더의 손에 넘어갔고 그녀의 삼촌은 그 집의 주관자가 되었다. 게다가 하만이 구가하던 페르시아 2인자의 반지는 모르드개 손가락을 휘감았고 제국의 질서를 관장하는 지위까지 수중에 들어왔다. 에스더와 모르드개 두 사람은 이제 남부러울 것이 없어졌다. 성공과 출세의 포만감에 나른하게 풀어져도 좋을 생의 절정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에스더는 하만의 제거가 하만이 쓴 조서의 제도적 효력까지 제거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자신의 영달만을 생각하고 있었다면 유다인의 운명이야 생존의 낭떠러지 끝자락에 내몰리든 말든 개의치 않았을 것이지만 에스더의 마음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가득차 있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나아가 백성과 자신이 한 배를 탄 운명 공동체란 사실도 망각하지 않았다. "내가 어찌 내 민족의 화 당함을 참아 보며 내 친척의 멸망함을 참아 보리이까." 유다인을 멸하려고 작성된 조서를 취소해 달라고 했다.

이 말을 왕에게 건내기 위해서 에스더는 "왕이 에스더를 향하여 금홀을 내어미는" 생사의 고비를 넘어야만 했다. 사실 왕이 에스더의 요청을 들으면서 "하만도 죽었고 하만의 전 재산도 너에게 넘겼는데 뭘 또 바라냐?"고 불쾌한 심경을 드러내며 역정을 부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녀는 또 다시 죽음을 각오한 청탁을 올렸다. 에스더의 리더십은 백성들에 대한 사랑과 죽음도 불사하는 헌신으로 드러났다. 이는 마치 요셉이 애굽의 실세가 되었을 때에 히브리 사람들의 운명을 뒤바꾼 상황과 유사하다.

진정한 리더는 자신의 영달을 추구하는 자가 아니라 교회의 회복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영화롭게 되도록 섬기는 사환이다. 교회의 회복을 주문하는 자가 아니라 목숨을 걸고 그것을 도모하는 자이다. 생명책에 적힌 자신의 이름삭제 요청을 하나님께 올렸던 모세 및 어떠한 것도 끊지 못한다는 그리스도 사랑에서 끊어진다 할지라도 민족의 돌이킴을 소원하던 바울이 모범을 보였다. 이는 자기 백성들의 죄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조차 대속물로 내려 놓고 섬기시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모형이다.

이 여인 앞에서 부끄러움 때문에 고개가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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