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16일 일요일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사람

본문: 빌립보서 3장 7-12절

 1. 바울의 파격적인 가치관: 자기에게 유익하던 것조차 배설물과 해로 여겼는데 이는 그리스도 예수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고 싶어하는 그의 신앙적인 가치관과 우선순위 때문이다. 그리스도 예수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는 방법은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과 죽음 및 부활과 영광에 동참하는 것이다. 동참하는 차원에서 얻어지는 지식 취득이 그의 방법이다. 이런 삶의 방향을 따라 그가 당한 고난과 마음의 사형선고 같은 "죽음"의 계기들은 상상을 불허한다. 바울이 맞이한 최후는 죽음에서 부활에 이르신 예수님의 고통스런 발자취도 본받고자 하였다. 육체를 신뢰할 만함에 있어서 바울은 타인의 추종을 불허했던 인물이다. 출생한 지 팔일만에 할례를 받았은 정통 이스라엘 백성이며 당연히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 사람이며 율법에 있어서는 당시 최고급 학풍의 미래였고 제도권 속에서도 종교적 특심이 두루 인정된 소장파 리더였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을 해로 배설물 정도로 간주했다.

 2. 먼저 자기에게 유익하던 것을 배설물과 해로 여기는 바울의 정신세계 속에는 어떤 원리가 작동하고 있는지가 궁금하다. 우리 각자에게 유익한 것들에는 어떠한 내용들이 있는가? 재능, 건강, 가정, 재물, 학위, 저술, 친구, 환경 등등이 있을 것이다. 나에게 유익한 것은 남에게도 유익하고, 내가 가지고 싶어하는 것들은 타인들도 소유를 갈망하는 것들이다. 당연히 거기에서 비교가 생기고 열등감과 우월감의 교차가 일어난다. 유익한 소유물에 근거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그런 규정을 갈망하는 일들이 발생한다.

 3. 소유라는 것은 대체로 우리의 신분과 정체성을 대변하는 수단으로 동원된다. 우리도 어떤 상대방을 소유물에 근거하여 인식하는 데에 익숙하다. 이는 소유를 존재의 일부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진 것이 없으면 자신에 대한 존재감, 즉 자존감이 추락한다. 어쩌면 이것이 소유의 속성인지 모르겠다. 우리가 가진 소유물에 의해 우리가 소유를 당한다는 역설적인 속성 말이다. 이러한 속성을 하나님은 잘 알고 계신다. 돈이 많으면 돈을 의존하게 되고, 지식이 많으면 지식에 의존하게 되고, 학위를 따고 높은 지위를 획득하면 그것에 의존하고 그것을 따라서 자신을 규정하고 타인을 평가하는 식으로 소유를 당하게 된다는 속성은 우리의 삶 속에서 얼마든지 경험하는 실재이다. 돈이 많으면 가난한 자들을 무시하게 되고, 지식이 많으면 무지한 사람들을 경시하게 되고, 고위직에 오르면 하위직에 있는 사람들을 우습게 생각한다. 이러한 것들이 다 소유를 당하는 현상이다.

 4.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시다. 바울은 하나님을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분이라고 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호흡을 하면 자기가 스스로 호흡하여 독립적인 존재처럼 산다고 생각한다. 가진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도 받은 것의 배후에 있는 주신 분에게로 소급하지 않는다. 어떠한 소유물을 가져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바울의 결론은 이렇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존재하고 기동하며 산다. 즉 내가 가진 모든 소유물은 주어진 것이며 주어진 주체를 가리키는 증거라는 것이다. 주어진 소유물에 도취될 것이 아니라 소유물의 공급자인 하나님께 관심을 돌리라는 싸인이란 이야기다. 소유물에 소유되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에 의해서만 사로잡힌 바 되고자 모든 것을 해로 간주했다.

 5.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 자체가 실제로 해로운 것이거나 배설물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최고의 선이요 모든 선의 원천이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늘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시다. 문제의 핵심은 하나님이 주신 것들이 해롭거나 배설물에 불과한 것이라고 “여겼다”는 바울의 태도가 중요하다. 받지 아니한 것이 없는 바울의 모든 소유물을 해로 여겼던 이유는 바로 바울이 보기에 1)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했기 때문이다. 동일한 내용의 다른 표현으로, 2) 그리스도 예수를 얻고 3)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는 언급도 했다.

 6. 이 세 가지는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리스도 예수를 얻지 못하면 그를 올바르게 아는 것이 아니며 그리스도 예수를 얻는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되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소유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리스도 예수를 얻는다는 것은 예수님께 소유를 당한다는 것, 그에게 완전히 사로잡힌 바 된다는 것과 동일하다. 우리의 생명과 삶과 몸과 영혼과 마음과 생각은 내 것이 아니라 모두 주님의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생명을 가졌으며 주님께서 우리 안에 사시며 우리의 몸은 주님께 드려져야 할 산제사며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어야 하고 우리의 생각은 주님의 새 계명으로 충만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주님의 소유가 되어지는 것이다.

 7. 최근에 신학박사 학위를 끝마쳤다.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의 고상함에 비하면 배설물에 불과하고 얼마든지 나에게 혹은 타인에게 해로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칭호가 하나 생겼다고 나 자신이 변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나는 사람들에 의해 전도사로 불려진다. 최근에는 박사라고 불려진다. 아이들은 나를 아빠라고 부른다. 아내에게 나는 남편이다. 나는 다양한 방식으로 발견된다. 그러나 바울처럼 나도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되고 싶다.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8.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되는 삶을 추구했다. 그런데 12절에 다소 특이한 표현이 등장한다. 즉 바울이 추구하는 삶은 “그리스도 예수에 의해 사로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διώκω δὲ εἰ καὶ καταλάβω, ἐφ’ ᾧ καὶ κατελήμφθην ὑπὸ Χριστοῦ)” 달려가는 삶이다. 이러한 삶을 추구하는 구체적인 방식은 “1) 그리스도, 2) 그의 부활의 권능, 3) 그의 고난에 참예함이 무엇인지 알고자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고자 한다”는 것이다. 바울에게 성도가 추구해야 할 삶이란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삶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까지 본받고자 했다. 날마다 죽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사시는 것이라”는 말의 의미는 바로 이것이다. 그 사람을 보면 예수님이 보이는 사람이 바로 그 안에 예수님이 사시는 사람이다.

 9. 이러한 삶은 일회적인 이벤트가 아니다. 말 그대로 지속적인 삶이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시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얻고 예수님 안에서만 발견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 그런데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고 말하면서 그리스도 예수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는 사람이란 그것을 추구하는 그리스도 취득의 여정을 일평생 지속하는 사람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자신이 그러한 경주 중이라고 고백한다. 과거의 성취와 명성이란 "뒤에 있는 것"은 잊어 버리고자 했으며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는" 삶을 경주했다.

 10. 세상의 소유물은 얼마든지 빼앗기고 분실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는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에 근거하여 어느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삶의 목적과 방향이 그리스도 예수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설정되면 하루의 모든 순간들에 소멸되지 않는 의미가 부여된다. 왜 사냐는 질문을 받으면, 뚜렷한 삶의 목표와 방향성의 부재 혹은 빈곤을 자신의 삶 속에서 확인하는 경우가 많다. 삶의 우선순위, 즉 무엇이 중요하고 긴급한 것인지에 대한 체계적인 질서가 확립되지 않으면 우리 각자의 너무나도 소중한 하루는 대체로 허탄하고 썩어 없어지는 목적에 동원될 수밖에 없다. 잠자고 일어나고 먹고 마시고 만나고 대화하고 일하고 도모하는 모든 것들이 시간 때우기에 불과하다.

 11. 삶의 포커스는 하나님 자신에게 맞추시길 권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길 권한다. 그리스도 예수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는 사람이 되시기를 원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와 부활의 권능과 고난과 죽음에 참예하는 삶을 경주하길 바란다.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사람들: 바울만 그리스도 예수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는 가장 고상한 지식을 추구하지 않았다. 믿음의 선배들이 있었다.

 1. 믿음의 조상이 받은 선물: 창세기 15:1절,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라." 이 구절의 구체적인 의미가 빌립보서 본문이다.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궁극적인 선물이 잘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믿음의 조상은 아들을 달라고 했다. 여기에서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을 통하여 발견되는 사람이고 싶어 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를 물리치지 않으시고 하나의 징표로서 이삭을 주셨지만 진정 주시고자 하셨던 본질은 아브라함 후손인 그리스도 예수시다.

 2. 모세의 헌신: 히브리서 11:24-26,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랐기 때문이라." 모세도 믿음의 조상에게 약속된 상급을 갈망하는 삶을 추구했기 때문에 제국의 통치권과 최대의 보화도 배설물로 여길 수 있었다.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온갖 고난과 수모를 감수했다. 그리스도 예수를 얻고 그에게서 발견되는 게 다른 무엇보다 소중했다.

 3. 시인의 만족: 시편 17: 14-15, "여호와여 금생에서 저희 분깃을 받은 세상 사람에게서 나를 주의 손으로 구하소서 그는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심을 입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 남은 산업을 그 어린 아이들에게 유전하는 자니이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기막힌 구절이다. 재물과 자녀와 상속의 삶은 모든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의 모습이다. 그러나 시인은 주님의 형상으로 만족할 것이라고 한다. 주님의 형상을 본받는 것은 하나님이 만세 전부터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해 작정하신 내용이다.

 4. 시인의 갈망: 시편 73: 25, 28,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이러한 시인 아삽의 고백도 같은 맥락이다. 하늘과 땅에 우리가 사모하는 것이 무엇인가? 바울이 생각했던 썩어 없어지고 마는 해롭고 더러운 배설물은 아닌가? 하늘은 하나님의 모든 신령한 복들을 가리키는 것일테고, 땅은 이 생에서의 모든 기름진 복들을 가리키는 것이리라. 그런데 시인은 하나님 자신이 바로 하늘과 땅에서 갈망하고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 고백한다.

5. 세례요한: 요한복음 3: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세례 요한이 모든 선지자와 율법의 종결자란 사실에 근거하여 우리는 단순히 본문이 한 개인 요한만을 가리키지 않고 선지자와 율법 전체를 지시하고 있다고 해석해도 무방하다.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의 흥왕과 대비되게 철저히 쇠하였던 인물이다. 그리스도 예수만 남고 황망한 광야에서 급히 존재가 소멸되는 소리였다. 요한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되는 인물이 되었는데 그 방식은 자신이 철저하게 쇠망하는 것이었다. 이는 선지자와 율법에도 적용된다. 모든 선지자와 율법은 쇠하여야 한다. 율법 폐기론적 차원에서 내뱉는 주장이 아니다. 선지자와 율법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를 가리키며 그분만을 드러내야 한다. 율법을 읽고 선지자를 만날 때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만 발견할 수 있어야 하겠다. 그리스도 예수와의 만남이 없는 구약읽기 시도는 완전한 불발이다.

진정한 신앙은 하나님 자신을 선물로 생각하고 그분 안에서만 발견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다른 것이 있는 그만큼 신앙에 약점과 공격의 빌미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사람이 알아주는 것은 잠깐이다. 아무리 탁월해도 다음 세대에는 기억함이 없다는 것이 전도자의 경험적 교훈이다.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 예수의 것으로 우리 안에 그분이 사시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자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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