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4일 화요일

에스더 9장을 내일 설교한다

에스더 9장을 설교한다.

1. "아달월 12월 13일(1절)." 하만이 유대인을 진멸하기 위해 제비를 뽑아 결정된 살육의 날이었다. 그러나 이 날은 하만과 하만의 자녀들 및 그를 추종하는 무리들이 진멸되는 반전의 날이었다. 참으로 역동적인 삶의 모습이다. 바울의 고백으로 해석을 대신하자: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2. "유다인이 자기를 해하고자 하는 자를 죽이려 하니(2절)." 주님의 원수사랑 조항과 상반된 처신처럼 보여 이마살을 찌푸리게 한다. 그러나 이는 메튜헨리 주석이 지적한 것처럼 유다인 자신의 정당하고 필연적인 방어(their own just and necessary defense)로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다. 16절에 언급된 조서의 내용처럼, 유다인의 하만 무리들 진멸은 고의적인 공격이나 적극적인 학살이 아니라 "스스로 생명을 보호하여 대적들의 손에서 벗어나는" 소극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갈대아 의역본에 따르면 당시 유대인을 대적했던 유일한 사람들은 아말렉 족속이라 한다. 이들에 대해 출애굽기 17장 14절은 "내가 아말렉을 도말하여 천하에서 기억함이 없게 하리라"고 기록한다. 그러나 유다인이 이들을 진멸한 것은 이런 출애굽기 기억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해하고자 하는 하만 무리들의 선제공격 이후에 이루어진 정당방어 형식을 취하였다. 그리고 당시 제국의 적법한 법집행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이 새로운 조서에 첨부한 "그 재산을 탈취하게 하는 조항"에 대해서는 정당한 권리도 행사하지 않았다. 즉 원수들의 재산은 손대지 아니했다. 당시 유다인은 피에 굶주리고 재물에 눈먼 폭도가 아니었다.

3. "도륙하되 그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아니했다 (10, 15, 16)." 조서에 분명히 명시된 합법적 권리였다. 유다인이 적법한 노획물 취득의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나는 사울이 아말렉을 진멸할 때에 재물에 눈이 어두워서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는 최악의 불경을 저질렀던 과거의 역사를 유다인이 기억으로 더듬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사울은 하나님이 금하신 것을 취했으나 에스더의 유다인은 적법한 것까지도 챙기고자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묘하게 중첩된다. 여기서 유다인의 태도가 주는 교훈이 심히 육중하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이 설정한 삶의 범위에 종속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무리 세상에서 적법하게 합의된 권리나 자유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빛이 발휘되는 계기가 아니라면 과감하게 거절하고 스스로를 쳐서 제한할 수 있어야 한다. 다다익선 차원에서 무엇이든 있을 때 챙기고자 하는 순간 오히려 유혹의 덫에 걸려든다. 나에게 유익하던 것이 배설물과 해로움의 근원일 수 있음은 이미 바울이 똑 부러지게 잘 말하였다. 그리고 왕이 에스더의 또 다른 소청이 있는지를 묻자 왕후가 "내일도 오늘날 조서대로 행하게 해 달라"고 하였을 때 유다인은 이번에도 재산만은 건드리지 않았다. 한번 적법한 권한을 포기하면 인정을 받았다 생각하고 다음에는 한번쯤 누리고자 하는 마음이 발동할 법도 한데 그러지를 않았다. 재물과의 결탁에 대해서는 그림자 정도로도 흉내내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참으로 하나님의 백성다운 모습이다. 자유와 권리가 극대화된 나라와 시대에서 관찰되는 공통된 교회의 모습은 세상과 구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다운 면모가 사라지고 맥아리가 없어진다. 삶의 원리와 규범인 하나님의 말씀에 제어를 받는 삶이 아니라 세상이 허락한 자유와 권리 구가하는 일에 급급했기 때문에 초래된 결과일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하겠다.

4. 또 하나 주목해야 할 대목이 있다. 왕명으로 내려진 페르시아 조서는 아무도 취소할 수 없었다. 그런데 왕은 자신의 권위와 통치력이 휘청거릴 가능성을 불사하고 기존의 조서를 번복하는 정반대의 새로운 조서를 허락했다. 관원들은 물론이고 민심도 생사가 걸린 두 조서에 대한 반응이 엇갈려 국론이 분열되고 심각한 대립의 양상으로 발전하여 왕조가 붕괴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사태가 어떤 국면으로 접어들지 모르는 럭비공 상황에서 신적인 섭리의 개입을 증거하는 듯한 결정적인 요소가 관찰된다. 즉 모든 민족이 유다인을 두려워 하였으며 (2절), 페르시아 각 도 모든 관원과 대신과 방백과 왕의 사무를 보는 자들이 두려워 떨면서 모르드개 눈치를 살펴야만 했다(3절)는 것이다. 한글 성경에는 인과를 보여주는 "키이(כִּי)"가 빠졌는데 히브리어 원문에는 모든 백성과 관원이 두려움에 빠졌던 원인을 명시하는 인과율 접속사가 있다.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과 동일하게 모르드개 이름을 페르시아 제국에서 날로 창대하게(גָדוֹל) 하였고 이로써 모든 사람들의 두려움을 일으키신 것이다. 하나님이 열국의 마음을 충동하고 열왕의 마음을 보의 물처럼 임의로 주관하는 분이라는 사실은 구약의 상식이다.

5. 진정한 회복은 하나님의 손이 있다.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다. 겸손한 자에게 은혜 베푸시는 하나님 앞에서 교회가 회개의 재를 뒤집어 쓰는 참된 겸손의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 물론 에스더서 전체에서 하나님은 부림절 사태의 원인과 결과의 인과율 안에서 어떠한 변수로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존재와 개입을 배제할 수는 없다. 에스더의 하나님은 스스로 감추시는 분으로서 자신을 계시하신 것이다. 함의가 적지 아니하다. 하나님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가 명시되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이 전면에 등장하지 않는 성경의 모든 부분들과 역사의 모든 페이지에 하나님이 주체로 계시다는 선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시다. 사람의 인식에 존재가 흔들리는 분이 아니시다. 인식의 유무를 떠나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근거를 에스더가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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