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를 아는 지식,
서로 맞물려서 지식의 상보적인 동반자다.
칼빈이 이것을 처음 시작한 것은 아니다.
쯔빙글리가 먼저 이러한 인식론의 포문을 열었다.
비록 서로 보완적인 관계를 가졌다고 할지라도
칼빈은 “먼저 전자에 대해 논의하고
그 다음에 후자를 논하는 것이
교수법의 정당한 순서”(ordo recte docendi)라고 하였다.
이것은 어쩌면 실존주의 사상의 침투를
칼빈이 허용한 셈이라고 주장하기 쉽다.
그러나 성경을 떠난 실존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범위 안에서의 실존은 존중되지 않으면 안된다.
바르트는 칼빈의 어법을 차용하긴 하였으나
헤겔의 방법을 의존하여 변증법적 신학으로 기울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순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며
인간을 안다고 하는 순간 인간을 모르는 지적 줄타기가 그 특징이다.
칼빈을 읽고 배운다고 할지라도
이처럼 접근법에 엇각이 발생하면
수습할 수 없는 결론의 격차가 초래될 수 있다.
성경의 인식론적 원리를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는 겸손이 요구된다.
서로 맞물려서 지식의 상보적인 동반자다.
칼빈이 이것을 처음 시작한 것은 아니다.
쯔빙글리가 먼저 이러한 인식론의 포문을 열었다.
비록 서로 보완적인 관계를 가졌다고 할지라도
칼빈은 “먼저 전자에 대해 논의하고
그 다음에 후자를 논하는 것이
교수법의 정당한 순서”(ordo recte docendi)라고 하였다.
이것은 어쩌면 실존주의 사상의 침투를
칼빈이 허용한 셈이라고 주장하기 쉽다.
그러나 성경을 떠난 실존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범위 안에서의 실존은 존중되지 않으면 안된다.
바르트는 칼빈의 어법을 차용하긴 하였으나
헤겔의 방법을 의존하여 변증법적 신학으로 기울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순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며
인간을 안다고 하는 순간 인간을 모르는 지적 줄타기가 그 특징이다.
칼빈을 읽고 배운다고 할지라도
이처럼 접근법에 엇각이 발생하면
수습할 수 없는 결론의 격차가 초래될 수 있다.
성경의 인식론적 원리를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는 겸손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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