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신학의 이상을 구현하는 길은 결코 단순하지 않습니다. 개혁주의 신학을 비판하는 분들은 '지나치게 엄격한' '건조한' '죽은' '지나치게 사색적인' '차가운' 등의 수식어로 개혁주의 신학의 문제점을 꼬집고 있습니다. 이는 개혁주의 신학의 내용만을 지적한 것이 아니라 개혁주의 신학자의 성향까지 지적하는 것입니다. 적당한 변명도 필요할 것이지만 목에 반박의 핏대를 세우기 이전에 자신에 대한 정직하고 진실한 성찰이 우선인 것 같습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감정이나 감흥에 휘둘리지 않고 유명세에 의존하는 법도 없으며 나에게 유익이 된다거나 끌리는 호기심에 맡겨지는 법이 없으며 상황의 시급한 필요에 성급하게 맞추고자 하지도 않으며 오직 진리이기 때문에 붙들고 따른다는 정신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사람의 동의도 구하지 않으니 외부에서 보기에는 정나미가 뚝 떨어질 수 있는 체질을 가지고 있어 보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각 개인을 하나님 앞에 선 단독자로 만드는 경향을 보입니다. 군중이 아니라 개개인의 마음을 격동하며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깊고 꾸준한 책임감을 갖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신학을 고수하는 개인으로 하여금 외톨이가 되게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실 개혁주의 신학은 친밀감이 가장 높아야 할 신학적 특성을 가졌는데 그런 특성의 구현에는 적잖은 미진함을 보입니다. 치열한 자기와의 싸움이 예상되는 대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사람이 스스로 도달할 수 없는 높은 가치를 제시하기 때문에 믿음의 유무를 떠나 하나님의 은총이 임할 때까지 상대방을 한없이 기다려야 합니다. 항구적인 끈기가 발휘될 것을 요구하는 신학이며 상대방의 자발성이 훼손되는 어떤 방식으로 찬동과 계승을 독촉하는 법이 없습니다. 어떠한 종류의 강압이나 강요도 사용할 수 없는 경우에 요구되는 접근법은 본을 보이는 것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그것을 요청하고 있으며, 모든 것을 하나님의 역사에 내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한국의 개혁주의 신학은 끈덕진 기다림에 있어서 고평가를 받기 어려울 듯합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내용이나 방법에 있어서 인간론 중심성을 거부하고 신론 중심적일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우리의 성정에 거북하고 때때로 상식과의 불편하고 불유쾌한 불일치도 경험하고 마치 우리의 존재감도 주변으로 밀려나는 듯한 박탈감에 부딪히는 경우도 있습니다. 나는 광야이고 죄인 중에 괴수이고 무익한 종이고 잠간 있다가 사라지는 안개처럼 무가치한 존재로 내몰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개혁주의 신학은 외로움과 고독과 인내와 불편함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자아와 인간적인 가치관의 한 자락도 남아나는 것을 용납하지 않기에 엄청난 손실과 상실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그 길을 끝까지 고집하는 사람들의 성향은 당연히 ‘독종’에 가까워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 성향의 소유자가 풍기는 인상은 친절과 매력과 감화력과 심히 동떨어진 것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인물들과 신학에 비판의 뾰족한 날을 세우시는 분들에게 객관적인 명분과 실증이 없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다면 어떤 대안이 있을까요? 가장 높은 가치를 가졌다고 믿는다면 그것을 가장 고급한 방식으로 값없이 나누고 공유할 가장 넉넉한 마음을 가져야 하겠고, 주장하고 논쟁하는 자세가 아니라 본을 보이는 태도를 갖추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최고의 복음을 가지고 그것을 전하는 자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나아가 개혁주의 신학을 고수하고 설파하기 위해 비장한 각오의 ‘살벌함’을 풍기고 알리는 것을 개혁주의 기수의 표징으로 이해하고 있다면 그런 가식적인 생각을 서둘러 철회해야 합니다. 개혁주의 신학을 공부하고 고수하는 자는 개혁신학 자체의 몽롱한 플라톤적 로멘스에 빠지는 자가 아니라 기쁨과 즐거움과 자발성과 희열과 감격으로 충만한 자입니다. 신학의 개혁파적 정의에서 이미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내는 교리라는 실천적 성격이 잘 증거되고 있습니다. 당연히 좋은 신학적 내용의 담지는 종착지가 아니라 출발점일 뿐입니다.
다윗이 주야로 하나님의 계명을 묵상한 이유가 그 계명을 즐거워 했기 때문이란 사실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이처럼 자신의 길을 즐거움 중에 걸어가는 것보다 더 향기롭고 매력적인 일이 없음을 생각할 때 개혁주의 신학의 길도 유쾌한 자발성과 자율성을 수반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이는 객관적인 내용의 마땅한 수용이 주관적인 자발성에 의해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는 뜻입니다.
게다가 타인을 대하는 태도는 가장 좋은 것을 가장 고급한 방식으로 전달하는 자의 자태여야 합니다. 우월성에 도취되어 서두루고 위협하고 독촉하는 식이 아니라 아무리 수용하지 않고 거부와 비판의 태도로 일관한다 할지라도 끝까지 참고 기다리며 상대방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겸손과 친절과 관용의 자세에 있어서는 추호의 흔들림도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로 보건대, 과연 개혁주의 신학자의 문은 좁고 길은 협착한 것 같습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인간의 전적인 본성적 부패를 한 순간도 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은 우리가 모든 대상과 사태와 상태를 시간이 종결되는 순간까지 인내할 수 있는 근거이며, 인간의 전적인 부패는 진리를 아무리 거부하고 멸시하고 멀리해도 기이한 일 당하는 것처럼 여기지 않고 끝까지 기다릴 수 있는 이유인 탓입니다.
진리를 허무는 무리들의 거친 물살에 휩쓸리고 저항하다 보면 발등의 불 끄기에도 급급하고 한발짝 물러서서 객관적 거리를 두고 전방위적 침착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심히 어렵고 고독한 일임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체질과 어투와 행실이 거칠고 딱딱해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좋은 것을 주고 가장 높은 가치를 공유하는 것 자체가 주는 희열이 식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의 내용적 부요함과 그것을 전하고 공유하는 자의 고결한 자세는 늘 겸비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내용이 빈약한데 자세만 고매하면 안되겠고, 자세는 뻣뻣한데 내용만 부요해도 안될 것입니다. 이는 진리의 이성적인 정보취득 정도에 만족하지 않고 진리의 전인격적 체득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양한 교단에서 다양한 신학을 경험해 보면, 비록 신학적 다문화 경험이 좋은 것만도 아니고 자랑할 일도 아니지만 최소한 교파주의 우물 속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심히 안타까운 교훈은 짭짤하게 건질 수 있습니다. 신학을 배우러 가는 교단의 교실마다 타교단 비판에 무슨 애국심 수준의 ‘교파심’ 발휘가 콘테스트 현장을 방불하는 경험을 했습니다. 하여 까칠한 비판을 토하는 분들의 면면을 나도 까치한 눈을 부릅뜨고 살피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이 진정으로 진리를 사랑하고 보존하고 선포하고 퍼뜨리는 일에 진실한 노력과 특심을 가지지는 않았다는 인상을 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자신의 신학적 존재감을 타교단 신학의 부실과 허술과 부조화와 유아성 확인과 지적에서 찾으려는 참으로 가난한 신학자와 목회자가 적지 않습니다. 나도 이런 부류에 몸을 담았었고, 지금도 개가 토한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우를 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학을 공부하는 자세의 지향점은 그것을 철저히 경계하고 있습니다.
다른 교파들도 동일하게 자신의 신학을 최고로 여길 것이지만, 저도 개혁주의 신학을 성경에 가장 가깝고, 가장 좋은 전통을 가장 잘 계승하고, ‘전성경’(tota Scriptura)과 ‘오직성경’(sola Scriptura) 정신을 가장 잘 유지하고, 하나님 자신만을 높이고 하나님이 전부이며, 진리와 사랑의 조화 및 이론과 실천의 융합에 가장 충실하고, 신구약의 통일성에 가장 민감하고, 통합적인 신학을 가장 잘 구현하는 신학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개혁주의 신학의 엄밀성 제고를 위해 높이와 넓이와 깊이와 길이의 정도를 더하고자 하루하루 성경을 묵상하고 글을 읽고 대화하고 실천하는 일에 개개인이 전심으로 노력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를 위해 최소한 자신을 향해서는 가장 좋고 좁고 엄밀한 신학 추구에 언제나 주마가편 차원의 매서운 회초리를 들어야 하겠으나 타인을 향해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타인에게 개혁주의 신학의 엄밀한 잣대를 들이대며 기준치의 미달을 지적하고 신학적 못난이로 매도하고 가슴에 일평생 잊혀지지 않을 상흔을 남기며 개혁주의 신학에 싸늘한 반감만 불러 일으키고 결국 사람도 잃고 좋은 신학에도 어두운 이미지를 드리우는 비판 일변도를 질주하는 사람은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를 허물고 훼방하는 자입니다. 진리를 사랑하고 전파하길 원한다면, 자신을 향해서는 가장 좋은 신학의 가장 높고 깊은 엄밀성을 추구하되 타인을 행해서는 원수라도 기도하고 축복하며 사랑하는 가장 길고 넓은 포용성을 추구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가장 좋은 것을 주고자 하면서도 가장 답답하고 해롭고 거칠고 무례한 것을 주는 것처럼 오해하고 거절하게 만드는 것은 증인의 참모습과 무관해 보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을 추구하길 원한다면 내향적 엄밀성과 외향적 포용성의 조화를 어느 하나를 취하면 다른 것은 버려야 하는 배타적 택일의 문제로 보아서는 안됩니다. 이런 관점의 균형을 가졌다 할지라도 이어지는 문제는 이것이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두 성향이 담아질 수 있는 큰 인격과 신앙을 구비하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을 가르치는 것까지는 스승의 몫이지만 그것을 인격과 삶과 교회에 구현하는 것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각자의 몫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의 길을 걸어가는 자의 태도로 하나 더 언급하고 싶은 것은 “우리는 진리를 거슬러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고전13:8)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스스로를 그렇게 진단했고 모든 기독인도 그래야 한다는 따끔한 일침을 날리고 있습니다. 진리를 거스리는 일이라면 차선책이 아니라 안하는 게 상책일 것입니다. 바울은 진리를 위하지 않고 거스르는 것을 행위능력 자체가 동결되는 사안으로 이해한 것 같습니다. 진리를 거스르는 것과 진리를 위하는 것이 나란히 대비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진리를 거스르지 않는 것만도 다행일 것이지만, 바울은 진리를 거스르지 말라는 소극적인 처신을 넘어 진리를 위하라는 적극적인 태도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모든 순간과 모든 삶이 진리를 위하지 않으면 진리에 대해 역방향을 질주할 수밖에 없다는 뜻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칼빈은 교회의 목회자를 비롯한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은 진리의 봉사자(ministri veritatis)요 풀어서 말하자면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건덕과 올바른 교리의 권위(Dei gloriae, ecclesiae aedificationi et sanae doctrinae autoritati)를 훼방하지 않고 위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고, 명예로운 이미지를 관리하고, 사람들의 가려운 귀를 긁어주고, 비대한 세속권력 앞에 눈도장 찍기에 바빠 발바닥에 땀이 맺히고, 사람들을 움직이는 은밀하고 어두운 수단과의 결탁에는 주저함이 없는 목회자가 되어 진리를 거스르는 원흉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진리를 위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할 일이 없어지는 백수 목회자가 되는 게 훨씬 더 낫습니다.
개혁주의 신학을 공부하며 늘 뇌리의 아랫목을 차지하는 다음과 같은 고민들과 단상들을 짧게 나누고 싶습니다.
1) 책을 읽고 토론을 하고 글을 쓰면서 관심과 가치의 구심점이 성경의 핵심에서 멀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어느 분야를 섭렵하고 나만의 고유한 지적 상아탑을 구축하여 사람들의 관심과 칭찬을 흡입하며 고지의 나른한 쾌감에 잠기는 방향으로 관심이 쏠립니다. 인간문맥 속에서 합의되고 설정된 임의적인 기준에 희비를 걸고 매달리는 자신을 발견할 때면 코의 호흡으로 연명하며 훅 불면 날리우는 인생의 경박이 한없이 부끄럽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2) 신학에서 변증은 필연적인 것입니다. 이는 어떠한 이슈든 시시비비, 옳고그름 문제는 발생하기 마련이고 거기에 반응하는 것은 신학의 실천적인 본성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람에게 변론의 각을 세운다고 해서 경건의 근육이 단련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엉뚱하고 기형적인 기질이 인격과 삶에 군살처럼 박힐 위험성만 더욱 높아지는 듯합니다. 그렇다고 침묵이나 무관심은 더더욱 능사가 아닐 것입니다. 하여 어떤 특정인, 특정학파, 특정시대 신학이나 신앙의 문제에 개입하고 해명하는 것은 불가피한 과제로 간주하되 성경 전체의 진리가 고백되고 보존되고 전달될 수 있도록 늘 전역사의 세계교회 전체를 의식하지 않으면 아니될 것입니다.
3) 괜찮은 믿음의 선배들은 진리를 왜곡하고 파괴하는 다양한 이단들의 광란을 도저히 침묵할 수 없어서 변증의 입술을 열고 논박의 붓날을 세웠지만 상대방이 내세우는 그릇된 논지의 허리를 꺾는 것 자체를 능사로 여기지를 않았던 것 같습니다. 묻고 답하는 중에 무의식적 타협과 수긍에 매몰되어 결국 진리의 순수성과 엄밀성이 무너지고 마는 변론의 생태적 한계를 간파하고 있었기에 완급과 원근을 적당하게 조절하며 균형을 유지하려 했습니다. 잘못과 오류를 수정하기 위해서는 책망의 채찍도 필요하고 교훈의 당근도 필요하며 의로움의 구축과 올바름의 정립도 필요한 균형 말입니다.
4)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문헌들을 읽고 다양한 사안들과 마주치고 다양한 필요들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시간과 관심과 에너지의 유한성 때문에 이러한 것들에 다 반응하며 살기는 곤란할 것입니다. 선택과 집중의 필요성을 절박하게 느낍니다. 선택과 집중의 기준과 방편이 궁금하여 물음의 일급 리스트에 올려두고 줄기차게 고민한 끝에 성경이 모든 역사와 모든 만물의 헤아릴 수 없도록 무수한 것들에 대한 최상의 선택과 집중이란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성경은 세세한 것들을 일일이 다 건드리지 않으면서 온 세상과 전 역사를 다 커버하고 있습니다. 놀랍고 신비로운 일입니다. 성경에 매달리면 몸이 열이라도 해결하지 못하는 과제들이 백기로 투항하는 현상을 일상처럼 접합니다.
5) 성경 텍스트를 붙들고 씨름하는 것 자체가 가장 즐겁고 행복함을 느낍니다. 한 이오타만 씹어도 진리의 황홀한 맛에 곧장 중독되고, 그것이 내 영혼에 달기가 송이꿀의 당분을 무색할 정돕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의 고상함을 맛본 바울이 자신에게 유익하던 것조차 배설물에 불과하고 해로운 것으로 여겼던 그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사실에서 발견한 변증의 소박한 해법은 변증이나 논박이 특정한 사안에 몰입되어 두뇌와 입술을 동원하는 방식으로 상대방의 머리를 공격하고 입술을 틀어막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선택과 집중이 내 인격과 삶에 체화되고 축적되어 그 자체가 상대방의 인격과 삶에 발견적인 해법이 되는 식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6)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란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입니다. 진리가 인격과 삶으로 머물러야 하는 곳입니다. 변론의 생리는 머리와 입술을 분주하게 하여 우리 자신이 먼저 진리의 터와 기둥이 되어야 한다는 선행적인 과정을 무시하고 생략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교모한 함정으로 보입니다. 사단이 팠습니다. 사단은 이런 논쟁에서 지더라도 우리가 변론의 덫에 걸리기만 하면 궁극적인 면에서는 이기는 승부수를 노리고 있습니다. 이는 사단이 깔아놓은 논쟁의 판에 뛰어드는 것 자체가 조심스런 이유일 것입니다. 그래서 전인격적 무장이 우선이고 필요에 따라서만 언어와 붓을 사용하는 것이 지혜라는 생각을 갖습니다.
7) 당장 반박의 피를 토하지 않으면 심각한 위기가 초래될 것 같은 긴박한 상황들이 많이 발생함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이때 침묵은 비겁으로 간주될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논쟁의 무대에 준비되지 않은 등판이 더 위험해 보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산출된 이후에 곧장 영국 본토에선 실종되고 만 그렇게도 우람한 진리의 체계가 뿌리마저 뽑히는 기현상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결코 가볍지 않고 단순한 것도 아닙니다. 지식의 생산과 진리의 파종이 항상 병행하는 것은 아니라는 교훈 말입니다. 물론 진리가 어느 시대나 지역에 심겨지는 것은 기적이고 은혜일 것입니다. 진리를 머리만이 아니라 심장과 수족에 보관하는 건 은혜 수혜자의 도리일 것 같습니다.
8) 보다 심오하고 높은 진리의 골격을 다시 생산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역사 속에는 이미 주님께서 허락하신 교훈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사 속에서 가장 화려하게 빛난 진리의 고백들을 고작 입술에 올렸다고 신학자의 소임을 접는다면 큰 오산일 것입니다. 그것을 전인격과 삶 전체에 담아내는 과제는 교회의 몫입니다. 하나님의 진리가 한 시대의 심장을 관통하게 하는 것은 그 진리를 자신의 심장에 담아낸 진정한 진리의 사람들이 나타나야 가능한 일입니다. 사탄은 이것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생명보다 귀한 진리를 시끄러운 논쟁의 꺼리로 매도하는 일에 고도의 교활함을 보입니다. 사탄은 진리가 논쟁의 도마 위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안깐힘을 쓰고 있습니다.
9) 교회는 진리의 터와 기둥으로 정의될 수 있습니다. 진리는 교회의 신분이고 인격이고 삶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천재나 영웅 몇 사람의 활약으로 때우려는 ‘창조적인 소수’ 개념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진리의 보존에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 개개인이 모두 동일한 비중으로 진리의 터와 기둥이란 교회의 정체성 보존에 참여해야 합니다. 이것은 일회성 운동이나 이벤트가 아니기에 선동이란 접근법도 올바르지 않습니다. 우리의 방법론은 진리의 터와 기둥으로 각자가 선 자리에서 일평생 살아내는 삶이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의 터로 닦아져야 하고 기둥으로 세워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10) 끝으로 겸손에 대한 것입니다. 칼빈은 겸손이 진정한 기독교 철학의 토대라는 것과 신앙의 덕은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이며 천사를 마귀로 만드는 건 교만이나 사람을 천사로 만드는 건 겸손이라 한 교부들의 생각을 “항상 열렬히”(semper vehementer) 곱씹으며 기독교의 교훈을 묻는 이들에게 "항상" 이렇게 답했다고 말합니다.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겸손(humilitatem)이다.” 이런 답변은 우리가 “본성의 가능성에 대해”(de naturae possibilitate) 무엇을 그렇게도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지를 묻습니다. 본성은 상하였고 부서졌고 뒤틀렸고 망했지만, 그런데도 사람이 자기에게 어떤 덕이 있다고 의식하며 동시에 자랑과 교만을 삼가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겸손 이외에는 자기에게 피난처가 없다고 진심으로 느낄 때에 거기에 비로소 겸손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은 “악에 불과하기”(non nisi mali) 때문에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서만 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우리가 무언가를 돌린다고 해서 우리의 복지가 그만큼 삭감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낮음을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를 힘입을 준비(in remedium paratam)라고 칼빈은 말합니다. 진정한 겸손은 자신의 능력에 대한 생각을 삭제하는 것에 있지 않고 자신의 “자애와 야심”(φιλαυτίας και φιλονεικίας)이란 질병을 퇴치하는 것에 있습니다. 이 질병 때문에 사람들은 시야가 흐려지고 스스로를 과대하게 평가하는 경향을 갖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칼빈은 “성경이란 진실한 거울”(veraci scripturae speculo) 속에서 스스로를 바르게 인식할 것을 권합니다. 칼빈에게 겸손은 결국 “성경 앞에서의 겸손”이며, 성경이 세상에서 합의된 다양한 종류의 모든 겸손들을 상대화할 기준인 것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감정이나 감흥에 휘둘리지 않고 유명세에 의존하는 법도 없으며 나에게 유익이 된다거나 끌리는 호기심에 맡겨지는 법이 없으며 상황의 시급한 필요에 성급하게 맞추고자 하지도 않으며 오직 진리이기 때문에 붙들고 따른다는 정신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사람의 동의도 구하지 않으니 외부에서 보기에는 정나미가 뚝 떨어질 수 있는 체질을 가지고 있어 보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각 개인을 하나님 앞에 선 단독자로 만드는 경향을 보입니다. 군중이 아니라 개개인의 마음을 격동하며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깊고 꾸준한 책임감을 갖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신학을 고수하는 개인으로 하여금 외톨이가 되게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실 개혁주의 신학은 친밀감이 가장 높아야 할 신학적 특성을 가졌는데 그런 특성의 구현에는 적잖은 미진함을 보입니다. 치열한 자기와의 싸움이 예상되는 대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사람이 스스로 도달할 수 없는 높은 가치를 제시하기 때문에 믿음의 유무를 떠나 하나님의 은총이 임할 때까지 상대방을 한없이 기다려야 합니다. 항구적인 끈기가 발휘될 것을 요구하는 신학이며 상대방의 자발성이 훼손되는 어떤 방식으로 찬동과 계승을 독촉하는 법이 없습니다. 어떠한 종류의 강압이나 강요도 사용할 수 없는 경우에 요구되는 접근법은 본을 보이는 것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그것을 요청하고 있으며, 모든 것을 하나님의 역사에 내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한국의 개혁주의 신학은 끈덕진 기다림에 있어서 고평가를 받기 어려울 듯합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내용이나 방법에 있어서 인간론 중심성을 거부하고 신론 중심적일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우리의 성정에 거북하고 때때로 상식과의 불편하고 불유쾌한 불일치도 경험하고 마치 우리의 존재감도 주변으로 밀려나는 듯한 박탈감에 부딪히는 경우도 있습니다. 나는 광야이고 죄인 중에 괴수이고 무익한 종이고 잠간 있다가 사라지는 안개처럼 무가치한 존재로 내몰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개혁주의 신학은 외로움과 고독과 인내와 불편함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자아와 인간적인 가치관의 한 자락도 남아나는 것을 용납하지 않기에 엄청난 손실과 상실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그 길을 끝까지 고집하는 사람들의 성향은 당연히 ‘독종’에 가까워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 성향의 소유자가 풍기는 인상은 친절과 매력과 감화력과 심히 동떨어진 것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인물들과 신학에 비판의 뾰족한 날을 세우시는 분들에게 객관적인 명분과 실증이 없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다면 어떤 대안이 있을까요? 가장 높은 가치를 가졌다고 믿는다면 그것을 가장 고급한 방식으로 값없이 나누고 공유할 가장 넉넉한 마음을 가져야 하겠고, 주장하고 논쟁하는 자세가 아니라 본을 보이는 태도를 갖추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최고의 복음을 가지고 그것을 전하는 자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나아가 개혁주의 신학을 고수하고 설파하기 위해 비장한 각오의 ‘살벌함’을 풍기고 알리는 것을 개혁주의 기수의 표징으로 이해하고 있다면 그런 가식적인 생각을 서둘러 철회해야 합니다. 개혁주의 신학을 공부하고 고수하는 자는 개혁신학 자체의 몽롱한 플라톤적 로멘스에 빠지는 자가 아니라 기쁨과 즐거움과 자발성과 희열과 감격으로 충만한 자입니다. 신학의 개혁파적 정의에서 이미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내는 교리라는 실천적 성격이 잘 증거되고 있습니다. 당연히 좋은 신학적 내용의 담지는 종착지가 아니라 출발점일 뿐입니다.
다윗이 주야로 하나님의 계명을 묵상한 이유가 그 계명을 즐거워 했기 때문이란 사실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이처럼 자신의 길을 즐거움 중에 걸어가는 것보다 더 향기롭고 매력적인 일이 없음을 생각할 때 개혁주의 신학의 길도 유쾌한 자발성과 자율성을 수반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이는 객관적인 내용의 마땅한 수용이 주관적인 자발성에 의해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는 뜻입니다.
게다가 타인을 대하는 태도는 가장 좋은 것을 가장 고급한 방식으로 전달하는 자의 자태여야 합니다. 우월성에 도취되어 서두루고 위협하고 독촉하는 식이 아니라 아무리 수용하지 않고 거부와 비판의 태도로 일관한다 할지라도 끝까지 참고 기다리며 상대방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겸손과 친절과 관용의 자세에 있어서는 추호의 흔들림도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로 보건대, 과연 개혁주의 신학자의 문은 좁고 길은 협착한 것 같습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인간의 전적인 본성적 부패를 한 순간도 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은 우리가 모든 대상과 사태와 상태를 시간이 종결되는 순간까지 인내할 수 있는 근거이며, 인간의 전적인 부패는 진리를 아무리 거부하고 멸시하고 멀리해도 기이한 일 당하는 것처럼 여기지 않고 끝까지 기다릴 수 있는 이유인 탓입니다.
진리를 허무는 무리들의 거친 물살에 휩쓸리고 저항하다 보면 발등의 불 끄기에도 급급하고 한발짝 물러서서 객관적 거리를 두고 전방위적 침착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심히 어렵고 고독한 일임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체질과 어투와 행실이 거칠고 딱딱해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좋은 것을 주고 가장 높은 가치를 공유하는 것 자체가 주는 희열이 식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의 내용적 부요함과 그것을 전하고 공유하는 자의 고결한 자세는 늘 겸비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내용이 빈약한데 자세만 고매하면 안되겠고, 자세는 뻣뻣한데 내용만 부요해도 안될 것입니다. 이는 진리의 이성적인 정보취득 정도에 만족하지 않고 진리의 전인격적 체득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양한 교단에서 다양한 신학을 경험해 보면, 비록 신학적 다문화 경험이 좋은 것만도 아니고 자랑할 일도 아니지만 최소한 교파주의 우물 속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심히 안타까운 교훈은 짭짤하게 건질 수 있습니다. 신학을 배우러 가는 교단의 교실마다 타교단 비판에 무슨 애국심 수준의 ‘교파심’ 발휘가 콘테스트 현장을 방불하는 경험을 했습니다. 하여 까칠한 비판을 토하는 분들의 면면을 나도 까치한 눈을 부릅뜨고 살피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이 진정으로 진리를 사랑하고 보존하고 선포하고 퍼뜨리는 일에 진실한 노력과 특심을 가지지는 않았다는 인상을 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자신의 신학적 존재감을 타교단 신학의 부실과 허술과 부조화와 유아성 확인과 지적에서 찾으려는 참으로 가난한 신학자와 목회자가 적지 않습니다. 나도 이런 부류에 몸을 담았었고, 지금도 개가 토한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우를 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학을 공부하는 자세의 지향점은 그것을 철저히 경계하고 있습니다.
다른 교파들도 동일하게 자신의 신학을 최고로 여길 것이지만, 저도 개혁주의 신학을 성경에 가장 가깝고, 가장 좋은 전통을 가장 잘 계승하고, ‘전성경’(tota Scriptura)과 ‘오직성경’(sola Scriptura) 정신을 가장 잘 유지하고, 하나님 자신만을 높이고 하나님이 전부이며, 진리와 사랑의 조화 및 이론과 실천의 융합에 가장 충실하고, 신구약의 통일성에 가장 민감하고, 통합적인 신학을 가장 잘 구현하는 신학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개혁주의 신학의 엄밀성 제고를 위해 높이와 넓이와 깊이와 길이의 정도를 더하고자 하루하루 성경을 묵상하고 글을 읽고 대화하고 실천하는 일에 개개인이 전심으로 노력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를 위해 최소한 자신을 향해서는 가장 좋고 좁고 엄밀한 신학 추구에 언제나 주마가편 차원의 매서운 회초리를 들어야 하겠으나 타인을 향해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타인에게 개혁주의 신학의 엄밀한 잣대를 들이대며 기준치의 미달을 지적하고 신학적 못난이로 매도하고 가슴에 일평생 잊혀지지 않을 상흔을 남기며 개혁주의 신학에 싸늘한 반감만 불러 일으키고 결국 사람도 잃고 좋은 신학에도 어두운 이미지를 드리우는 비판 일변도를 질주하는 사람은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를 허물고 훼방하는 자입니다. 진리를 사랑하고 전파하길 원한다면, 자신을 향해서는 가장 좋은 신학의 가장 높고 깊은 엄밀성을 추구하되 타인을 행해서는 원수라도 기도하고 축복하며 사랑하는 가장 길고 넓은 포용성을 추구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가장 좋은 것을 주고자 하면서도 가장 답답하고 해롭고 거칠고 무례한 것을 주는 것처럼 오해하고 거절하게 만드는 것은 증인의 참모습과 무관해 보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을 추구하길 원한다면 내향적 엄밀성과 외향적 포용성의 조화를 어느 하나를 취하면 다른 것은 버려야 하는 배타적 택일의 문제로 보아서는 안됩니다. 이런 관점의 균형을 가졌다 할지라도 이어지는 문제는 이것이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두 성향이 담아질 수 있는 큰 인격과 신앙을 구비하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을 가르치는 것까지는 스승의 몫이지만 그것을 인격과 삶과 교회에 구현하는 것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각자의 몫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의 길을 걸어가는 자의 태도로 하나 더 언급하고 싶은 것은 “우리는 진리를 거슬러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고전13:8)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스스로를 그렇게 진단했고 모든 기독인도 그래야 한다는 따끔한 일침을 날리고 있습니다. 진리를 거스리는 일이라면 차선책이 아니라 안하는 게 상책일 것입니다. 바울은 진리를 위하지 않고 거스르는 것을 행위능력 자체가 동결되는 사안으로 이해한 것 같습니다. 진리를 거스르는 것과 진리를 위하는 것이 나란히 대비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진리를 거스르지 않는 것만도 다행일 것이지만, 바울은 진리를 거스르지 말라는 소극적인 처신을 넘어 진리를 위하라는 적극적인 태도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모든 순간과 모든 삶이 진리를 위하지 않으면 진리에 대해 역방향을 질주할 수밖에 없다는 뜻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칼빈은 교회의 목회자를 비롯한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은 진리의 봉사자(ministri veritatis)요 풀어서 말하자면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건덕과 올바른 교리의 권위(Dei gloriae, ecclesiae aedificationi et sanae doctrinae autoritati)를 훼방하지 않고 위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고, 명예로운 이미지를 관리하고, 사람들의 가려운 귀를 긁어주고, 비대한 세속권력 앞에 눈도장 찍기에 바빠 발바닥에 땀이 맺히고, 사람들을 움직이는 은밀하고 어두운 수단과의 결탁에는 주저함이 없는 목회자가 되어 진리를 거스르는 원흉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진리를 위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할 일이 없어지는 백수 목회자가 되는 게 훨씬 더 낫습니다.
개혁주의 신학을 공부하며 늘 뇌리의 아랫목을 차지하는 다음과 같은 고민들과 단상들을 짧게 나누고 싶습니다.
1) 책을 읽고 토론을 하고 글을 쓰면서 관심과 가치의 구심점이 성경의 핵심에서 멀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어느 분야를 섭렵하고 나만의 고유한 지적 상아탑을 구축하여 사람들의 관심과 칭찬을 흡입하며 고지의 나른한 쾌감에 잠기는 방향으로 관심이 쏠립니다. 인간문맥 속에서 합의되고 설정된 임의적인 기준에 희비를 걸고 매달리는 자신을 발견할 때면 코의 호흡으로 연명하며 훅 불면 날리우는 인생의 경박이 한없이 부끄럽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2) 신학에서 변증은 필연적인 것입니다. 이는 어떠한 이슈든 시시비비, 옳고그름 문제는 발생하기 마련이고 거기에 반응하는 것은 신학의 실천적인 본성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람에게 변론의 각을 세운다고 해서 경건의 근육이 단련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엉뚱하고 기형적인 기질이 인격과 삶에 군살처럼 박힐 위험성만 더욱 높아지는 듯합니다. 그렇다고 침묵이나 무관심은 더더욱 능사가 아닐 것입니다. 하여 어떤 특정인, 특정학파, 특정시대 신학이나 신앙의 문제에 개입하고 해명하는 것은 불가피한 과제로 간주하되 성경 전체의 진리가 고백되고 보존되고 전달될 수 있도록 늘 전역사의 세계교회 전체를 의식하지 않으면 아니될 것입니다.
3) 괜찮은 믿음의 선배들은 진리를 왜곡하고 파괴하는 다양한 이단들의 광란을 도저히 침묵할 수 없어서 변증의 입술을 열고 논박의 붓날을 세웠지만 상대방이 내세우는 그릇된 논지의 허리를 꺾는 것 자체를 능사로 여기지를 않았던 것 같습니다. 묻고 답하는 중에 무의식적 타협과 수긍에 매몰되어 결국 진리의 순수성과 엄밀성이 무너지고 마는 변론의 생태적 한계를 간파하고 있었기에 완급과 원근을 적당하게 조절하며 균형을 유지하려 했습니다. 잘못과 오류를 수정하기 위해서는 책망의 채찍도 필요하고 교훈의 당근도 필요하며 의로움의 구축과 올바름의 정립도 필요한 균형 말입니다.
4)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문헌들을 읽고 다양한 사안들과 마주치고 다양한 필요들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시간과 관심과 에너지의 유한성 때문에 이러한 것들에 다 반응하며 살기는 곤란할 것입니다. 선택과 집중의 필요성을 절박하게 느낍니다. 선택과 집중의 기준과 방편이 궁금하여 물음의 일급 리스트에 올려두고 줄기차게 고민한 끝에 성경이 모든 역사와 모든 만물의 헤아릴 수 없도록 무수한 것들에 대한 최상의 선택과 집중이란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성경은 세세한 것들을 일일이 다 건드리지 않으면서 온 세상과 전 역사를 다 커버하고 있습니다. 놀랍고 신비로운 일입니다. 성경에 매달리면 몸이 열이라도 해결하지 못하는 과제들이 백기로 투항하는 현상을 일상처럼 접합니다.
5) 성경 텍스트를 붙들고 씨름하는 것 자체가 가장 즐겁고 행복함을 느낍니다. 한 이오타만 씹어도 진리의 황홀한 맛에 곧장 중독되고, 그것이 내 영혼에 달기가 송이꿀의 당분을 무색할 정돕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의 고상함을 맛본 바울이 자신에게 유익하던 것조차 배설물에 불과하고 해로운 것으로 여겼던 그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사실에서 발견한 변증의 소박한 해법은 변증이나 논박이 특정한 사안에 몰입되어 두뇌와 입술을 동원하는 방식으로 상대방의 머리를 공격하고 입술을 틀어막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선택과 집중이 내 인격과 삶에 체화되고 축적되어 그 자체가 상대방의 인격과 삶에 발견적인 해법이 되는 식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6)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란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입니다. 진리가 인격과 삶으로 머물러야 하는 곳입니다. 변론의 생리는 머리와 입술을 분주하게 하여 우리 자신이 먼저 진리의 터와 기둥이 되어야 한다는 선행적인 과정을 무시하고 생략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교모한 함정으로 보입니다. 사단이 팠습니다. 사단은 이런 논쟁에서 지더라도 우리가 변론의 덫에 걸리기만 하면 궁극적인 면에서는 이기는 승부수를 노리고 있습니다. 이는 사단이 깔아놓은 논쟁의 판에 뛰어드는 것 자체가 조심스런 이유일 것입니다. 그래서 전인격적 무장이 우선이고 필요에 따라서만 언어와 붓을 사용하는 것이 지혜라는 생각을 갖습니다.
7) 당장 반박의 피를 토하지 않으면 심각한 위기가 초래될 것 같은 긴박한 상황들이 많이 발생함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이때 침묵은 비겁으로 간주될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논쟁의 무대에 준비되지 않은 등판이 더 위험해 보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산출된 이후에 곧장 영국 본토에선 실종되고 만 그렇게도 우람한 진리의 체계가 뿌리마저 뽑히는 기현상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결코 가볍지 않고 단순한 것도 아닙니다. 지식의 생산과 진리의 파종이 항상 병행하는 것은 아니라는 교훈 말입니다. 물론 진리가 어느 시대나 지역에 심겨지는 것은 기적이고 은혜일 것입니다. 진리를 머리만이 아니라 심장과 수족에 보관하는 건 은혜 수혜자의 도리일 것 같습니다.
8) 보다 심오하고 높은 진리의 골격을 다시 생산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역사 속에는 이미 주님께서 허락하신 교훈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사 속에서 가장 화려하게 빛난 진리의 고백들을 고작 입술에 올렸다고 신학자의 소임을 접는다면 큰 오산일 것입니다. 그것을 전인격과 삶 전체에 담아내는 과제는 교회의 몫입니다. 하나님의 진리가 한 시대의 심장을 관통하게 하는 것은 그 진리를 자신의 심장에 담아낸 진정한 진리의 사람들이 나타나야 가능한 일입니다. 사탄은 이것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생명보다 귀한 진리를 시끄러운 논쟁의 꺼리로 매도하는 일에 고도의 교활함을 보입니다. 사탄은 진리가 논쟁의 도마 위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안깐힘을 쓰고 있습니다.
9) 교회는 진리의 터와 기둥으로 정의될 수 있습니다. 진리는 교회의 신분이고 인격이고 삶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천재나 영웅 몇 사람의 활약으로 때우려는 ‘창조적인 소수’ 개념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진리의 보존에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 개개인이 모두 동일한 비중으로 진리의 터와 기둥이란 교회의 정체성 보존에 참여해야 합니다. 이것은 일회성 운동이나 이벤트가 아니기에 선동이란 접근법도 올바르지 않습니다. 우리의 방법론은 진리의 터와 기둥으로 각자가 선 자리에서 일평생 살아내는 삶이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의 터로 닦아져야 하고 기둥으로 세워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10) 끝으로 겸손에 대한 것입니다. 칼빈은 겸손이 진정한 기독교 철학의 토대라는 것과 신앙의 덕은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이며 천사를 마귀로 만드는 건 교만이나 사람을 천사로 만드는 건 겸손이라 한 교부들의 생각을 “항상 열렬히”(semper vehementer) 곱씹으며 기독교의 교훈을 묻는 이들에게 "항상" 이렇게 답했다고 말합니다.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겸손(humilitatem)이다.” 이런 답변은 우리가 “본성의 가능성에 대해”(de naturae possibilitate) 무엇을 그렇게도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지를 묻습니다. 본성은 상하였고 부서졌고 뒤틀렸고 망했지만, 그런데도 사람이 자기에게 어떤 덕이 있다고 의식하며 동시에 자랑과 교만을 삼가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겸손 이외에는 자기에게 피난처가 없다고 진심으로 느낄 때에 거기에 비로소 겸손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은 “악에 불과하기”(non nisi mali) 때문에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서만 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우리가 무언가를 돌린다고 해서 우리의 복지가 그만큼 삭감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낮음을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를 힘입을 준비(in remedium paratam)라고 칼빈은 말합니다. 진정한 겸손은 자신의 능력에 대한 생각을 삭제하는 것에 있지 않고 자신의 “자애와 야심”(φιλαυτίας και φιλονεικίας)이란 질병을 퇴치하는 것에 있습니다. 이 질병 때문에 사람들은 시야가 흐려지고 스스로를 과대하게 평가하는 경향을 갖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칼빈은 “성경이란 진실한 거울”(veraci scripturae speculo) 속에서 스스로를 바르게 인식할 것을 권합니다. 칼빈에게 겸손은 결국 “성경 앞에서의 겸손”이며, 성경이 세상에서 합의된 다양한 종류의 모든 겸손들을 상대화할 기준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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