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19일 수요일

닛사의 그레고리 (Gregory of Nyssa, 335-395)

교회의 역사에서 문제가 없었던 때는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의 질(質)이 가장 심각하고 복잡했던 기간을 택하라면 대부분의 학자들은 단연 AD 4세기를 꼽습니다. 1세기부터 3세기까지 교회는 예수님을 어떻게 구약의 관점에서 해석할 것인가에 몰입을 했습니다. 그러나 4세기에 오면 성직자와 신학자들 중에서 괜찮은 실력을 갖춘 이단들이 교회 내부에서 등장해 성경의 근본적인 가르침을 왜곡시켜 하나님의 교회를 대단히 어지럽게 했습니다. 이때 거짓을 막고 진리를 보존하기 위해 활약했던 대표적인 교부들이 아타나시우스, 바질,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 닛사의 그레고리 등입니다. 학자들은 아타나시우스를 제외한 3사람을 ‘갑바도기아(지금은 터키가 위치한 곳) 교부’라고 부릅니다. 그 중에서 친형 바질과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 이 두 사람의 유명세에 가려진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이번에 다루고자 하는 닛사의 그레고리, 그는 철학과 자연과학 분야에서 전문가 수준의 소양과 학식을 갖춘 분입니다. 한 서신에서 그는 형 바질만을 자신의 선생으로 모셨다고 밝힙니다. 그러나 형의 관심사를 넘어 그는 형보다 더 다양한 분야에서 폭넓은 식견을 갖춥니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Stoa), 필로(Philo)의 철학을 공부하고, 기하학과 천문학과 의학도 배웠으며 특별히 고대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와 갈레노스(Galenos)의 책까지 탐독의 지경을 두루두루 넓혔던 분입니다. 바질의 권고로 성직자의 길을 걷게 된 그레고리는 결국 371(372)년 닛사의 감독직에 오릅니다. 그러나 이단들의 모함에 의해 교회의 공금을 유용한 혐의를 받고 그 자리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이후 그는 보다 본격적인 이단과의 전쟁을 수행하며 신학과 철학과 삶에 관하여 방대한 저작을 남깁니다.

그의 시대에 있었던 신학적 문제를 간단히 말한다면 4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예수님은 하나님인 동시에 사람인가?  2)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 부를 수 있는가?  3) 예수님과 성령님은 신이 아니라 최고의 피조물이 아닌가?  4) 예수님과 성령님이 신이라면 성부 하나님과 동등한 신이신가? 이러한 주요 질문들에 대해서 교부들은 예수님을 완전한 하나님과 완전한 사람으로 알았으며, 예수님의 신적인 본성을 강조하기 위해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theotokos)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며, 예수님과 성령님은 열등한 신이거나 피조물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과 동일한 신적 본질(essentia divina)을 가지신 하나님이 되신다는 고백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하나님(tres Deos)을 말해서는 안되고 한 분 하나님(unum Deum)을 고백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나온 신학적인 용어가 ‘삼위일체(trinitas), 즉 하나님은 세 위격(tres persona)이며 한 본체(una essentia)’라는 것입니다. 이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같은 본질을 가졌지만, 동시에 각 위격은 서로 공유할 수 없는 고유한 특성(proprietas incommunicabilis)에 의해서 서로 구분된다’ 이런 뜻입니다. 닛사는 이러한 삼위일체 교리를 경건의 원리(εὐσεβείας λόγος)로 삼았던 분입니다. 하여튼 이러한 교리적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수많은 논쟁과, 허다한 증인들의 순교와, 여러 번의 국제적인 교회 공의회(council)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이단으로 정죄되는 과정을 거쳐야만 했습니다. 조금 어렵지만,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가 믿고 있는 진리의 핵심이 어떤 댓가를 지불하며 형성되어 왔는지를 한 번 상고해 보는 것도 괜찮은 일입니다.

닛사의 그레고리, 그는 오리겐(Origen, 185-254)의 [원리론(Περὶ ἀρχῶν)] 이후 처음으로 종합적인 신학의 체계(Oratio catechetica magna)를 구축한 분입니다. 이것은 학문을 위한 신학이 아니라 신앙의 교육적인 설명을 위해 신학적 틀을 제공하는 것으로서, 무엇이 신학의 올바른 방향인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신학은 성도 개개인과 교회의 성장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레고리 자신에게 신학과 경건은 결코 분리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신학과 경건의 기본적인 전제는, 기독교의 진리가 신비(μυστήριον)의 영역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성적 이해보다 신앙적 수용의 중요성을 외칩니다. 신비에 대한 그의 강조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가능성을 부정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완전하신 하나님께 사랑과 경외심을 가지고 끝없이 다가가기 위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의 권면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신적인 본성의 참여자(θείας κοινωνοὶ φύσεως)’가 되라고 권합니다. 이는 주님께서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들을 우리에게 주신 이유라고 말합니다.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들’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아마도 하나님 자신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우리의 죄와 의를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신 성자 하나님을 그런 방식으로 우리에게 주셨다는 말입니다. 제롬(Jerome)의 기록에 따르면, 베드로는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이 달려 죽으신 동일한 방식으로 못박히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ὰνάξιον)고 하여 거꾸로 매달려 순교를 당합니다 (PL 23:608). 예수님이 보이신 신적인 본성에 가장 가까이 참여한 자의 최후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신의 본성에 참여한 자가 어떤 자인지를 베드로는 자신의 ‘겸손한 죽음’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레고리가 베드로의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는 ‘신비의 깊은 것들(τὰ βάθη τοῦ μυστηρίου)’을 철저하게(ἀκριβῶς) 경험한 자들은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이해를 동일하게 신비로운 방식으로 우리의 영 안에서 얻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언어로 그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는 한계선을 긋습니다. 하나님의 본성을 설명함에 있어서는 수 개념이나 상식도 통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경우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언어의 방식으로 전달하는 것에는 한계가 분명히 있습니다. 어느 정도 적당한 지식은 전달할 수 있더라도 하나님의 본성에 대해서는, 바울이 말한 것처럼 언어의 지혜로운 말로는 전달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여기서 베드로의 권면을 생각해 보십시오. 믿는 우리에게 최고의 축복인 동시에 하나님의 본성을 전달하는 최고의 방법은 우리가 그 신적인 성품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 성품이 삶의 입체적인 현장에서 향기를 발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제대로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경건의 비밀(τὸ τῆς εὐσεβείας μυστήριον)’이 크다고 말합니다. 그 비밀을 소유하는 것은 주님과의 인격적인 연합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복의 근원으로 부름을 받았다면 주님과의 연합이 있을 때, 비로소 경건의 비밀을 소유하고 그것을 타인과 나누는 진정한 복의 근원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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