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아무나 해석을 시도할 수 있지만 누구나 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신학의 세계는 누구나 뛰어들 수 있도록 열려 있지만 모두가 바른 신학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개혁파 정통주의 인물들은 성경을 해석하고 신학의 본격적인 연구에 들어가기 이전의 준비들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항목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1) 성경의 참되고 확실한 의미와 그것의 적용에 대해 삼위일체 하나님의 의해 주어지는 견고한 설득 (Prov. 2:6; 2 Pet. 1:20; 1 Cor. 12:3; Luk. 24:45): 이것은 신학의 출발점이 인간 자신이 아니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신학의 원리가 하나님과 성경과 성령의 조명이기 때문에 거기에서 시작되지 않은 신학의 출발점은 필히 그릇된 종점으로 귀결되고 말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시초적인 설득이 신학적 활동에 선행하고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그런 설득 때문에 아무리 신학의 고공을 행진해도 자랑과 교만은 어떠한 이유로도 뻣뻣한 고개를 내밀 수 없습니다.
2) 진실한 믿음과 순전한 마음과 선한 양심을 따라 하나님께 드려지는 기도(Augustine, De doctrina christiana III.xxxvii): 신학에의 본격적인 돌입 이전에 우리 자신을 쳐서 복종하는 기도가 선행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이는 우리의 가치와 기호와 의도를 겸허히 내려놓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하고 좋고 원하시는 것을 취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도들은 구제와 봉사를 다른 분들에게 부탁하고 "기도와 말씀"에 전무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기도가 말씀보다 앞선다는 순서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겠으나 무의미한 것은 아닌 듯합니다. 말씀을 읽더라도 나의 기호와 가치와 의도를 따라 읽어서는 안된다는 점, 한 순간도 망각하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3) 하나님을 향한 명확한 회심, 진실한 경건, 여호와에 대한 경외와 인간에 대한 존중 (Psal. 25:14; Prov. 1:7): 신학의 길을 간다는 것은 결코 다른 모든 것들을 소홀히 대하거나 무관심해 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깊은 차원에서 포용해야 할 것입니다. 이 대목은 확고한 돌이킴과 진실한 경건이 내면에 구비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서는 경외를, 인간을 향해서는 존중의 태도를 견지하지 않으면 신학에 첫발도 내디딜 준비가 되지 않았음을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는 말입니다.
4) 진리에 대한 사랑과 갈구 (Psal. 119:40, 47, 48): 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저녁에는 죽어도 좋다는 공자의 결에의도 미치지 못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진리를 생명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사랑과 그것을 향한 지칠 줄 모르는 갈구의 태도가 신학의 중요한 준비라는 말입니다. 일평생 진리만을 갈구했던 사랑의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의 범례가 우리의 시대에도 재연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5) 배움의 성향 혹은 경향 (John 3:21, 33): 배움은 겸손과 다르지 않습니다. 배움을 중단하는 사람은 무시로 교만과 동침하는 자입니다. 모든 의식과 생각과 언어와 행실이 배움의 항속적인 기질을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늘 배우고자 하는 자에게는 교실이 따로 없고 수업시간 구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언제든지 어디서나 늘 배우고 익힙니다. 알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넘어질까 조심하는 겸손의 자세가 바로 배움의 성향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6) 하나님의 확증된 뜻을 행하고자 하는 자발성 (John 7:17): 사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도 제대로 깨닫지를 못합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행하고자 하면 내 말이 나의 것인지 아버지의 것인지를 깨닫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대한 깨달음은 우리의 순종을 촉구하는 기계적 의무감을 주입하지 않습니다. 외부의 강요나 압박에 떠밀린 순종은 아직 순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올바른 깨달음은 우리에게 하고자 하는 자발적인 마음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외압적인 의무감을 느낀다면 자발성의 부재를 의심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7) 신앙과 선행에 대한 교리문답 수준의 교리적 지식 (Heb. 5: 12-14): 이는 어릴 때부터 교리문답 교육에 충실하여 기독교 진리의 기본적인 골격이 우리의 가치관과 행동양식 깊숙한 저변에 단단히 박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혹 기회가 없어서 이것을 생략하고 지나간 분들은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웨스터민스터 소요리문답 같은 초등 교리들을 익히고 또 익혀서 진리의 골격 세우는 작업이 우선적인 일일 것입니다.
8) 성경 언어들에 대한 숙지 (1 Cor. 14:5): 히브리어, 아람어, 헬라어는 기본으로 공부해 두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한글이나 영어나 한문성경 같은 번역문을 읽어도 좋겠지만 번역은 언제나 원문의 다양한 개념들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행위이고 달리 생각하면 다른 나머지의 개념들은 버리는 행위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성경의 역본들이 틀리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개별 단어와 문장이 가진 의미의 부요함은 원문에 미치지 못합니다. 영의 양식으로 때를 따라 꼴을 먹이도록 부름을 받았다면 가능하면 양질의 음식을 제공하는 것은 목회자의 도리인 것 같습니다.
9) 성경이 그 자체와 가장 조화롭고 아름답게 일치하고 있음에 대한 확신 (Augustine, epistola ad Hieronymum):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성경의 기록자나 특정한 시대적 상황에 근거하여 쪼개고 쪼개는 환원주의 행습을 따라 성경의 완벽한 조화와 통일성을 파괴하는 일이 신학계에 일종의 역병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인간 기록자와 기록의 인간적인 맥락을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겠으나 지나치게 과장하고 거기에 몰입하여 결국 유일하신 하나님이 성경의 제1 저자라는 사실을 망각하면 학문이란 이름으로 저질러진 무서운 성경파괴 행위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시대적인 거리감이 있고 기록자가 다르고 주제의 이질성이 크다고 할지라도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유일하신 저자라는 사실에 근거하여 극복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성경을 읽고 신학을 연구하기 이전에 성경에 대해 인간의 환원주의 본성이 함부로 발휘되지 말아야 한다는 저자의 통일성에 따른 성경의 최고의 조화와 일치에 대한 확신이 여기에서 요청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준비의 과정을 거친 이후에 정통주의 인물들이 주로 성경과 교부들의 문헌에 의존하며 생각하는 성경 해석학의 일반적인 방법에는 다음과 같은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1) 성경의 지속적인 탐독 및 탐색;
2) 구약은 히브리어, 신약은 헬라어 원문으로 연구;
3) 성경 전체의 목적이요 주제인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향한 영속적인 조준 (John 5:39, Acts 3:18, Rom. 10:4);
4) 율법과 복음의 차이에 대해 분별의 안테나를 고정;
5) 올바른 순서와 적법한 방식으로 성경의 의미와 활용을 탐구;
6) 표현에 대한 숙고;
7) 동일한 주제를 다룸에 있어서 평행구절 및 유사구절 비교와 보다 명료한 구절과 애매한 구절의 비교;
8) 텍스트를 해명하기 위해 이질적인 다른 구절과의 대조;
9) 성경을 활용하기 위해 새로운 신학적 언어들을 고안하는 것의 제한 (Deut. 4:2);
10) 텍스트의 해석이 사도신경 혹은 십계명과 같은 믿음의 유비 및 주된 교리들의 진리와 일치하는 것인지를 부지런히 살핌;
11) 예언이 다른 예언에 의해 제어를 당하듯이 성경의 해석이 다른 해석들에 의해 제어를 받는 식의 분별에 대한 지속적인 연습 (1. Cor. 14: 29-33);
12) 문법과 수사학과 변증학과 물리학과 같은 일반교양 및 일반학문 전반에 대한 지식의 확충 등입니다.
1) 성경의 참되고 확실한 의미와 그것의 적용에 대해 삼위일체 하나님의 의해 주어지는 견고한 설득 (Prov. 2:6; 2 Pet. 1:20; 1 Cor. 12:3; Luk. 24:45): 이것은 신학의 출발점이 인간 자신이 아니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신학의 원리가 하나님과 성경과 성령의 조명이기 때문에 거기에서 시작되지 않은 신학의 출발점은 필히 그릇된 종점으로 귀결되고 말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시초적인 설득이 신학적 활동에 선행하고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그런 설득 때문에 아무리 신학의 고공을 행진해도 자랑과 교만은 어떠한 이유로도 뻣뻣한 고개를 내밀 수 없습니다.
2) 진실한 믿음과 순전한 마음과 선한 양심을 따라 하나님께 드려지는 기도(Augustine, De doctrina christiana III.xxxvii): 신학에의 본격적인 돌입 이전에 우리 자신을 쳐서 복종하는 기도가 선행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이는 우리의 가치와 기호와 의도를 겸허히 내려놓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하고 좋고 원하시는 것을 취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도들은 구제와 봉사를 다른 분들에게 부탁하고 "기도와 말씀"에 전무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기도가 말씀보다 앞선다는 순서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겠으나 무의미한 것은 아닌 듯합니다. 말씀을 읽더라도 나의 기호와 가치와 의도를 따라 읽어서는 안된다는 점, 한 순간도 망각하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3) 하나님을 향한 명확한 회심, 진실한 경건, 여호와에 대한 경외와 인간에 대한 존중 (Psal. 25:14; Prov. 1:7): 신학의 길을 간다는 것은 결코 다른 모든 것들을 소홀히 대하거나 무관심해 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깊은 차원에서 포용해야 할 것입니다. 이 대목은 확고한 돌이킴과 진실한 경건이 내면에 구비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서는 경외를, 인간을 향해서는 존중의 태도를 견지하지 않으면 신학에 첫발도 내디딜 준비가 되지 않았음을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는 말입니다.
4) 진리에 대한 사랑과 갈구 (Psal. 119:40, 47, 48): 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저녁에는 죽어도 좋다는 공자의 결에의도 미치지 못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진리를 생명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사랑과 그것을 향한 지칠 줄 모르는 갈구의 태도가 신학의 중요한 준비라는 말입니다. 일평생 진리만을 갈구했던 사랑의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의 범례가 우리의 시대에도 재연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5) 배움의 성향 혹은 경향 (John 3:21, 33): 배움은 겸손과 다르지 않습니다. 배움을 중단하는 사람은 무시로 교만과 동침하는 자입니다. 모든 의식과 생각과 언어와 행실이 배움의 항속적인 기질을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늘 배우고자 하는 자에게는 교실이 따로 없고 수업시간 구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언제든지 어디서나 늘 배우고 익힙니다. 알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넘어질까 조심하는 겸손의 자세가 바로 배움의 성향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6) 하나님의 확증된 뜻을 행하고자 하는 자발성 (John 7:17): 사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도 제대로 깨닫지를 못합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행하고자 하면 내 말이 나의 것인지 아버지의 것인지를 깨닫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대한 깨달음은 우리의 순종을 촉구하는 기계적 의무감을 주입하지 않습니다. 외부의 강요나 압박에 떠밀린 순종은 아직 순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올바른 깨달음은 우리에게 하고자 하는 자발적인 마음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외압적인 의무감을 느낀다면 자발성의 부재를 의심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7) 신앙과 선행에 대한 교리문답 수준의 교리적 지식 (Heb. 5: 12-14): 이는 어릴 때부터 교리문답 교육에 충실하여 기독교 진리의 기본적인 골격이 우리의 가치관과 행동양식 깊숙한 저변에 단단히 박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혹 기회가 없어서 이것을 생략하고 지나간 분들은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웨스터민스터 소요리문답 같은 초등 교리들을 익히고 또 익혀서 진리의 골격 세우는 작업이 우선적인 일일 것입니다.
8) 성경 언어들에 대한 숙지 (1 Cor. 14:5): 히브리어, 아람어, 헬라어는 기본으로 공부해 두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한글이나 영어나 한문성경 같은 번역문을 읽어도 좋겠지만 번역은 언제나 원문의 다양한 개념들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행위이고 달리 생각하면 다른 나머지의 개념들은 버리는 행위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성경의 역본들이 틀리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개별 단어와 문장이 가진 의미의 부요함은 원문에 미치지 못합니다. 영의 양식으로 때를 따라 꼴을 먹이도록 부름을 받았다면 가능하면 양질의 음식을 제공하는 것은 목회자의 도리인 것 같습니다.
9) 성경이 그 자체와 가장 조화롭고 아름답게 일치하고 있음에 대한 확신 (Augustine, epistola ad Hieronymum):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성경의 기록자나 특정한 시대적 상황에 근거하여 쪼개고 쪼개는 환원주의 행습을 따라 성경의 완벽한 조화와 통일성을 파괴하는 일이 신학계에 일종의 역병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인간 기록자와 기록의 인간적인 맥락을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겠으나 지나치게 과장하고 거기에 몰입하여 결국 유일하신 하나님이 성경의 제1 저자라는 사실을 망각하면 학문이란 이름으로 저질러진 무서운 성경파괴 행위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시대적인 거리감이 있고 기록자가 다르고 주제의 이질성이 크다고 할지라도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유일하신 저자라는 사실에 근거하여 극복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성경을 읽고 신학을 연구하기 이전에 성경에 대해 인간의 환원주의 본성이 함부로 발휘되지 말아야 한다는 저자의 통일성에 따른 성경의 최고의 조화와 일치에 대한 확신이 여기에서 요청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준비의 과정을 거친 이후에 정통주의 인물들이 주로 성경과 교부들의 문헌에 의존하며 생각하는 성경 해석학의 일반적인 방법에는 다음과 같은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1) 성경의 지속적인 탐독 및 탐색;
2) 구약은 히브리어, 신약은 헬라어 원문으로 연구;
3) 성경 전체의 목적이요 주제인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향한 영속적인 조준 (John 5:39, Acts 3:18, Rom. 10:4);
4) 율법과 복음의 차이에 대해 분별의 안테나를 고정;
5) 올바른 순서와 적법한 방식으로 성경의 의미와 활용을 탐구;
6) 표현에 대한 숙고;
7) 동일한 주제를 다룸에 있어서 평행구절 및 유사구절 비교와 보다 명료한 구절과 애매한 구절의 비교;
8) 텍스트를 해명하기 위해 이질적인 다른 구절과의 대조;
9) 성경을 활용하기 위해 새로운 신학적 언어들을 고안하는 것의 제한 (Deut. 4:2);
10) 텍스트의 해석이 사도신경 혹은 십계명과 같은 믿음의 유비 및 주된 교리들의 진리와 일치하는 것인지를 부지런히 살핌;
11) 예언이 다른 예언에 의해 제어를 당하듯이 성경의 해석이 다른 해석들에 의해 제어를 받는 식의 분별에 대한 지속적인 연습 (1. Cor. 14: 29-33);
12) 문법과 수사학과 변증학과 물리학과 같은 일반교양 및 일반학문 전반에 대한 지식의 확충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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