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를 지속할 것인가? (롬6:1)
이는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는 언술 이후에 이어지는 말로서 바울이 은혜의 증대를 위해 더더욱 죄에 머물자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터무니 없는 논리를 꿰뚫고 결코 그럴 수 없다는 논지를 펼치기 위한 의식 전환용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가 범죄를 더하면 율법을 주신 율법 수여자의 의도와 목적에 부응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도출하는 것이 언뜻 보기에는 합리적인 듯하나 실상은 합리성을 구실로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부패성을 가리는 일입니다. 바울은 분명히 율법의 더함과 죄의 증대는 비례하고 은혜의 증대가 죄의 증대와 맞물려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율법의 수여로 말미암은 죄의 증대는 죄의 수효나 분량이 많아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던 것들까지 죄로 확인되기 때문에 늘어나는 증대를 뜻합니다. 죄의 증대로 말미암는 은혜의 증대도 물리적인 분량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칼빈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인간을 아는 지식이 모든 지혜의 요약인데 두 지식이 서로 보완적인 관계성을 갖는다고 간파한 것처럼 죄에 대한 지식이 증대되면 될수록 그동안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않았던 것들까지 은혜인 줄 알게 되기에 은혜에 대한 지식도 커진다는 뜻입니다.
율법은 우리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여 마땅한 것으로 여겼던 것들도 죄라는 사실을 깨닫게 만듭니다. 존재와 생각과 삶과 행위에 있어서 죄가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는 깨달음이 깊어지면 질수록 그 모든 것들을 십자가로 소멸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식도 더해지고 깊어지는 것입니다. 은혜의 증대를 원한다면 죄에 머물거나 죄의 분량적인 증대를 도모할 것이 아니라 율법에 대한 보다 깊은 지식으로 우리의 죄악된 실상을 더욱 속속들이 성찰하고 시인하고 돌이키는 것이 마땅한 듯합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입니다. 그렇다면 죄에 대한 지속적인 종노릇 방식으로 은혜의 증대를 꾀한다는 발상은 그 자체가 하나님과 우리를 아는 지식에 심각한 왜곡이나 결함이 있다는 증세인 듯합니다.
여기서 생각하고 싶은 내용이 있습니다. 성경은 개혁주의 신학의 독특성만 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즉 율법에 있어서도 제3사용만 강조하고 제1사용과 제2사용은 마치 무의미한 것처럼 무지하고 무시해도 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른 신학적 견해와 개혁주의 신학 사이의 차별에만 몰두할 것이 아니라 율법의 삼중적인 기능이 골고루 존중되는 신학의 전개로 기독교 내의 교리적 공통성과 차이성이 동시에 확인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해 보입니다.
기독교 진리의 부요한 보편성과 개혁주의 신학의 엄밀한 독특성은 동시에 추구될 필요가 있습니다. 기독교의 보편적 진리에 있어서는 빈곤한데 개혁주의 신학의 예리한 독특성만 추구하고 거기에서 신학적 존재감 확보를 도모하는 분들이 간혹 보입니다. 동시에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진리의 깊고 엄밀한 내용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으면서 모든 교회가 공유하는 것만 추구하여 의도하진 않았을 테지만 결과적인 면에서는 진리의 하향 평준화를 지향하게 되는 분들도 계신 듯합니다.
제가 아는 믿음의 선배들은 진리의 부요함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신학적 엄밀성에 있어서도 높은 경지를 구현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의 교의학을 보면 교리의 엄밀성을 수호하기 위한 변증의 매서운 주먹만 휘두르지 않고 교회의 건덕을 위해 풍요로운 꼴을 마련하되 심지어 성경책 밖에서도 하늘에서 비롯된 빛의 열매들이 흩어져 있는 모든 현장과 학문 영역들을 샅샅이 뒤지고 탐구하고 엄선한 그 열매들로 교회를 섬기고자 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진리의 일반성과 독특성의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철인적인 정신과 노력이 뒤따라야 하기 때문에 폭넓은 호응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최소한 그런 지향점 만큼은 고수할 수 있다면 그나마 최선이 아닐까 싶습니다. 특별히 개혁주의 신학을 추구하는 분들의 분발을 권면하고 싶습니다. 이런 권면의 채찍은 저의 종아리를 겨냥함이 우선일 터이지요.
이는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는 언술 이후에 이어지는 말로서 바울이 은혜의 증대를 위해 더더욱 죄에 머물자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터무니 없는 논리를 꿰뚫고 결코 그럴 수 없다는 논지를 펼치기 위한 의식 전환용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가 범죄를 더하면 율법을 주신 율법 수여자의 의도와 목적에 부응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도출하는 것이 언뜻 보기에는 합리적인 듯하나 실상은 합리성을 구실로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부패성을 가리는 일입니다. 바울은 분명히 율법의 더함과 죄의 증대는 비례하고 은혜의 증대가 죄의 증대와 맞물려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율법의 수여로 말미암은 죄의 증대는 죄의 수효나 분량이 많아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던 것들까지 죄로 확인되기 때문에 늘어나는 증대를 뜻합니다. 죄의 증대로 말미암는 은혜의 증대도 물리적인 분량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칼빈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인간을 아는 지식이 모든 지혜의 요약인데 두 지식이 서로 보완적인 관계성을 갖는다고 간파한 것처럼 죄에 대한 지식이 증대되면 될수록 그동안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않았던 것들까지 은혜인 줄 알게 되기에 은혜에 대한 지식도 커진다는 뜻입니다.
율법은 우리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여 마땅한 것으로 여겼던 것들도 죄라는 사실을 깨닫게 만듭니다. 존재와 생각과 삶과 행위에 있어서 죄가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는 깨달음이 깊어지면 질수록 그 모든 것들을 십자가로 소멸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식도 더해지고 깊어지는 것입니다. 은혜의 증대를 원한다면 죄에 머물거나 죄의 분량적인 증대를 도모할 것이 아니라 율법에 대한 보다 깊은 지식으로 우리의 죄악된 실상을 더욱 속속들이 성찰하고 시인하고 돌이키는 것이 마땅한 듯합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입니다. 그렇다면 죄에 대한 지속적인 종노릇 방식으로 은혜의 증대를 꾀한다는 발상은 그 자체가 하나님과 우리를 아는 지식에 심각한 왜곡이나 결함이 있다는 증세인 듯합니다.
여기서 생각하고 싶은 내용이 있습니다. 성경은 개혁주의 신학의 독특성만 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즉 율법에 있어서도 제3사용만 강조하고 제1사용과 제2사용은 마치 무의미한 것처럼 무지하고 무시해도 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른 신학적 견해와 개혁주의 신학 사이의 차별에만 몰두할 것이 아니라 율법의 삼중적인 기능이 골고루 존중되는 신학의 전개로 기독교 내의 교리적 공통성과 차이성이 동시에 확인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해 보입니다.
기독교 진리의 부요한 보편성과 개혁주의 신학의 엄밀한 독특성은 동시에 추구될 필요가 있습니다. 기독교의 보편적 진리에 있어서는 빈곤한데 개혁주의 신학의 예리한 독특성만 추구하고 거기에서 신학적 존재감 확보를 도모하는 분들이 간혹 보입니다. 동시에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진리의 깊고 엄밀한 내용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으면서 모든 교회가 공유하는 것만 추구하여 의도하진 않았을 테지만 결과적인 면에서는 진리의 하향 평준화를 지향하게 되는 분들도 계신 듯합니다.
제가 아는 믿음의 선배들은 진리의 부요함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신학적 엄밀성에 있어서도 높은 경지를 구현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의 교의학을 보면 교리의 엄밀성을 수호하기 위한 변증의 매서운 주먹만 휘두르지 않고 교회의 건덕을 위해 풍요로운 꼴을 마련하되 심지어 성경책 밖에서도 하늘에서 비롯된 빛의 열매들이 흩어져 있는 모든 현장과 학문 영역들을 샅샅이 뒤지고 탐구하고 엄선한 그 열매들로 교회를 섬기고자 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진리의 일반성과 독특성의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철인적인 정신과 노력이 뒤따라야 하기 때문에 폭넓은 호응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최소한 그런 지향점 만큼은 고수할 수 있다면 그나마 최선이 아닐까 싶습니다. 특별히 개혁주의 신학을 추구하는 분들의 분발을 권면하고 싶습니다. 이런 권면의 채찍은 저의 종아리를 겨냥함이 우선일 터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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