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19일 수요일

대 바질 (Basilius Magnus, 330-379)

바질은 동방의 갑바도기아 교부들 중에 가장 유명하고 출중한 분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Magnus라는 칭호가 붙은 교부는 바질 뿐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사용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특정한 교단이나 직위의 가치를 일부러 높이려는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붙여진 것이기 때문에 객관성이 거의 없습니다.

바질은 부요한 기독교 가문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슬하에서 학문적 기초를 닦았으며, 14살에 갑바도기아의 수도 가이사랴에 가서 3년 공부하고, 아테네로 가서 플라톤이 기원전 4세기에 설립한 아카데미아(Academia)에 입문하여 6년동안 수사학과 철학과 문학과 역사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최고의 고등 교육을 받습니다. 그러나 특별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바질은 세속적인 출세의 야망을 접고 수도원을 찾아 순례의 길을 떠납니다. 나아가 그는 남자들을 위한 수도원을 세우고 주님과의 하나됨을 추구하는 신앙의 길을 걷습니다. 바질은 은둔생활 속에서 혼자 실천하는 신비주의 운동을 거부하고 공동생활 속에서 공동체와 더불어 수행하는 신비주의 및 금욕주의 운동을 전개해 나갑니다. 이처럼 바질은 단순히 이론적인 기독교 교리의 정통성을 유지하는 것 뿐만 아니라, 수도생활, 기독교 교육 및 예배까지 다양한 분양에 관심을 가지고 실천적인 삶도 살았던 분입니다. 물론 너무 왕성한 활동성 탓인지 그는 50세가 못되어 단명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남긴 삶의 흔적과 저술들은 4세기의 가장 탁월한 기독교 지성인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이며 교회에 큰 유산이 되고 있습니다.

바질의 교리적 업적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개념을 ‘본질은 하나이며 실체는 셋 (mia ousia, treis hypostaseis)’이라는 도식으로 풀어낸 역사상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의 신앙과 신학이 동시에 빚어낸 최고의 업적은 ‘하나님과의 합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질이 저술한 가장 중요한 작품은 On the Holy Spirit (De Spiritu sancto)입니다. 거기에서 그는 성령의 행하신 일과 함께 성도의 궁극적인 갈망을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결점에서 깨끗하게 된 자들에게 빛을 비추시는 성령 하나님은 그 자신과의 연합을 통하여 그들을 거룩하게 만듭니다. 햇살이 밝고 투명한 물체에 떨어질 때 그 물체도 역시 찬란하게 빛나는 것처럼, 성령의 조명을 받아 성령을 지닌 영혼들도 역시 신령하게 되며 그 은혜를 타인에게 전달하게 됩니다. 미래의 예지, 신비들에 대한 깨달음, 감추어진 것들의 인식, 은사들의 분배, 하늘의 시민권, 천사들의 합창 속에 거하는 것, 끝없는 기쁨,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he pros Theon homoiosis), 가장 소망스런 것으로서(to akrotaton ton orekton) 하나님이 되어지는 것(Theon genesthai)이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De Spiritu 9.23).”

여기에 상당히 위험할 수도 있지만 대단히 흥미로운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되어지는 것.’ 이 부분은 마치 우리가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는 것처럼 해석될 수도 있어 바질을 이단으로 정죄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질의 전반적인 신학을 살펴보면, 인간이 신과 동등한 종류의 존재로 바뀌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구절에서, 한 발짝만 벗어나면 이단으로 내몰릴 수 있는 그 절묘한 줄타기를 편하게 피해 가는 것보다는 바질이 의도하고 있는 깊은 의미의 세계로 들어갈 것을 권면하고 싶습니다.

‘대공(Magnus)’이란 거창한 수식어가 붙는 바질이 이단으로 정죄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이 되어지는 것”이라는 표현을 굳이 선택한 것일까요? ‘신’이라는 말이 인간을 수식하는 용어로 채택된 성경적 사례도 찾아보면 물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방식으로 간편하게 해결해서 그냥 지나가는 것보다, 저는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과 은혜를 바질이 어떤 차원까지 생각하고 있는지를 탐구하고 싶습니다.

바질에 따르면, 하나님의 사람이 가장 소망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아져서 그분과 비기려는 사단의 무모한 도전을 우리가 계승하는 것처럼 이것을 이해하면 안됩니다. 이는 믿음의 본질에 관한 것입니다. 믿음의 장성한 분량에 관한 것입니다. 믿음의 선한 경주가 겨냥해야 하는,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말아야 할 방향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경외함이 동시에 요청되는 것입니다. 다른 어떤 외연적인 것과도 대체할 수 없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 이외에 다른 매개체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공로나 업적이나 축적이나 만족과 관련된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의 하나됨을 표현한 것입니다. 주님과의 가장 순수한 상태의 합일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주님과의 가장 투명한 교통과 연합을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가장 가까워진 상태를 묘사한 말입니다. 바질은 하나님이 바로 그런 교제와 연합을 원하신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축적과 정밀한 암기와 신비한 체험들이 주는 경건의 형태와는 판이하게 다른 차원의 신앙을 바질은 우리에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지식을 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바질의 신앙은 삼위일체 교리와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식과 습관에 안주하지 않는 신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 하나님이 되어지는 것은 흉내와 모방의 방식으로 되어지지 않습니다. 정말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만나는 것입니다. 동행하고 동거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안에, 하나님이 내 안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내 안에 성령으로 사시며 행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말한다고 어떤 실체가 손아귀에 확 잡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본질을 가장 엄밀하고 깊은 차원, 하나님과 온전히 하나되는 그런 차원까지 전심으로 침노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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