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19일 수요일

도망자 그레고리 (Gregory of Nazianzus, 330-390)

생의 중요한 고비마다 행적을 감추어서, 그레고리는 교부들 중에 도망자로 불리는 분입니다. 여러 번의 성직자직 제안을 받았지만 그는 그때마다 도망에 도망을(de derobade en derobade) 거듭하곤 했습니다. 현장에서 섬기는 것보다 학문 연마하는 것을 선호했던 것입니다. 교부들의 시대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관조적인 삶(vita contemplativa)과 활동적인 삶(vita activa) 사이에서 갈등을 했습니다. 관조적인 삶은 하나님을 보는 경지까지 이르기 위해 수도원에 들어가 철학과 신학을 연구하는 삶을 말하고, 활동적인 삶은 지식을 실천으로 옮기려고 일반적인 직업을 얻거나 성직자가 되는 삶을 말합니다.

그레고리는 관조적인 삶을 좋아하고 시와 수사학과 철학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던 것 같습니다. 기독교 희랍 시문학의 창시자로서, 그가 시작(詩作)에 애착을 가졌던 이유는 이방의 문학보다 기독교의 지혜와 지식이 더 우월함을 보이려는 것이었고,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 그가 사명으로 생각했던 것은 성경에 기록된 기독교의 진리를 헬라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전하는 ‘하나님의 전령’이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복잡한 신학적 내용을 쉽게 풀어서 일반인도 신학적인 문제에 흥미를 가지도록 한 그의 탁월함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는 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의 대주교에 임명되어, 관조하는 삶을 접고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논쟁으로 인해 갈라진 교회를 통합하고 바른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모든 재능을 붓끝에 담아 지상전(紙上戰)을 펼칩니다. 물론 혁혁한 공로를 세웁니다. 그 결과로 나온 작품이 바로 44편의 ‘연설집 (Orationes)’입니다. 그러나 그의 대주교 신분은 본인의 실수도 있었지만, 이단들의 집요한 중상과 모략으로 인해 짧게 끝납니다. 그는 예전에 주변의 강요 때문에 사시마(Sasima) 지역의 주교직을 수락하고 수행하고 있었는데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로 오면서 사임의 행정적인 절차를 매듭짓지 않는 실수를 범합니다. 이단들은 그런 실수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결국 양다리를 걸쳤다는 비난을 받고 그레고리는 로마의 수도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레고리 대주교를 신앙의 선배로 선택한 이유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추구함에 있어서 그가 보여준 경건한 태도와 인간적 한계에 대한 겸손하고 정직한 인식을 나누고자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레고리 시대에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신학을 논했던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경을 읽고 공부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행위의 연장이 아니라 그냥 마음에 안심을 주는 종교적 행습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그레고리는 ‘하나님을 항상 상고하는 것(pantote memneisthai)은 우리가 숨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신학을 논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영원히 묵상할 것을 권합니다. 신학적 논쟁에는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를 빼앗는 것 자체가 사단의 목적이 되는 그런 사소하고 소모적인 내용들이 많습니다. 그런 것들을 걸러내는 것은 사단의 속임수를 이기는 것이며, 인생을 절약하는 길입니다.

나아가 그레고리는 하나님을 생각하기 이전에 자신을 돌아볼 것을 권합니다. 인간의 본성이 죄로 얼마나 심각하게 파괴되어 있는지를 정직하게 살피면, 겸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죄악으로 뒤틀린 우리의 생각과 언어를 가지고는 하나님을 아는 것과 그분을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습니다(adunatos). 하나님이 아니라 자연에 대해서도, ‘어떤 사물 그대로의 지식(to ti tote esti touto eidenai)’은 우리가 ‘그것에 대해 안다고 생각하는 것’과 대단히 다른 것입니다. 우리의 시선은 빛과 대기의 협조(mesoi photos kai aeros) 없이는 사물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사물의 표면과 부딪쳐서 반사된 빛을 겨우 눈과 신경으로 편집하여 지각된 것을 가지고 무언가를 안다고 여기는 우리의 지식은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생래적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늘과 땅과 우주는 물론, 지극히 하찮은 미물에 대한 지식에 있어서도 우리가 감관(感官)으로 들어오는 정보에 근거해서 생각의 방식으로 지식을 산출하는 자로 있는 한 그 한계는 결코 극복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한계를 하나씩 제거해 나가다 보면, 우리 자신을 통째로 부인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창조된 자연도 그 지식에 있어서 이처럼 한계를 가지는데, 하물며 우리의 지각이 더듬을 수 없는 ‘영이신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에는 얼마나 더 깊고 심각한 한계가 있을까를 짐작하는 것은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그레고리는 지금까지 누구도 하나님의 본질을 발견한 사람이 없었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는 단정을 내립니다. 우리가 ‘예수님, 그리스도, 하나님, 여호와, 진리, 생명, 영, 능력, 창조자, 주님’이란 말들을 사용해서 하나님을 이해하고 설명하고 있지만 그런 언어들이 과연 하나님 자신의 순수한 지식을 다 담아내고 있느냐고, 그레고리는 묻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고 선하시고 의로우며 완전하고 영원하고 불변하며 지극히 높으시고 위대하신 분이라고 말할 때,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있는 것입니까? 이러한 것들은 귀신들도 알고, 옛날이나 지금이나 믿음이 없고 기독교를 파괴하려 드는 사람들도 언급하며 이용했던 말입니다. 그래서 그레고리는 하나님이 결코 언어의 호칭으로 묘사될 수 없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의 본질은 언어의 방식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떤 종류의 하나님(theoeides)’이 되든지, ‘그런 신성(touto theion)’을 가지든지 해야 한다고 그레고리는 믿습니다. 당연히 우리는 신도 아니고 신성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절망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사람의 형상을 입고 오셨으며, 승천하신 이후에 성령으로 오셔서 우리 안에 영원토록 거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앞에서 길게 언급한 이유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라는 것을 망각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질(Basilius Magnus)도 그랬지만, 그의 친구 그레고리도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을 생의 목적으로 두었던 이유도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관계된 것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입니다. 지식을 얻고 정보를 나열하는 그런 차원의 공부가 아닙니다. 그런 지식을 버려서도 물론 안됩니다. 더 깊은 곳으로 그물을 던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이 성령으로 내 안에 영원토록 거하시기 때문에 가능하게 된 그 하나됨이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며, 그 지식은 주님과의 더 깊은 합일(communion)로 우리를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그레고리는 삼위일체 교리로 휘청거린 교회의 질서를 회복하고 간사한 궤변으로 진리를 가리고 왜곡하던 이단들을 부끄럽게 했습니다.

그레고리 대주교를 읽으면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생각해 봤습니다. 그는 이방인의 입술에서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라는 말을 들었던 분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알리는 증인의 삶은 언어의 방식만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되어 동행하는 것으로 가능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귀신이나 사악한 궤변가가 내뱉는 하나님의 지식 수준이 아니라 아브라함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을 알고 증거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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