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19일 수요일

로마의 클레멘트: 핍박과 회개

비록 역사적인 증거는 강하지 않지만, 신약성경 사도들을 이어가는 1세기 교회 지도자 가운데 로마교회 사도적인 교부들 (Apostolic Fathers) 중 하나로 알려진 ‘로마의 클레멘트 (Clement of Rome, fl. 88-97)’라는 분이 계십니다. 그는 신약성경 안에 포함되지 않은 기독교 문서 중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쓰신 분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바울과 누가의 친구일 가능성을 주장하고 있지만 역시 객관적인 증거는 없습니다. 폴리캅에 이어 로마의 클레멘트 주교를 소개하는 이유는 그가 쓴 고린도 서신(바울이 쓴 서신과 다름)에서 시기(envy)와 회개(repentance)라는 관점으로 핍박의 역사를 간파한 그의 독특한 통찰력을 나누고자 하는 것입니다.

먼저 클레멘트는 시기를 가인으로 하여금 동생 아벨을 죽이게 만든 원흉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동일한 이유로 인하여, 야곱은 에서의 면전을 피해야만 했으며, 요셉은 형들에 의해 죽음으로 내몰리고 감옥소를 안방처럼 출입해야 하는 핍박을 받았으며, 모세는 파라오의 얼굴을 피해 황무한 광야길로 달아나야 했으며, 아론과 미리암은 모세에 대한 시기 때문에 공동체 밖에서 거처를 마련해야 했으며, 다단과 아비람은 동일한 시기로 인하여 땅에 삼키운 바 되었으며, 같은 이유로 사울은 다윗을 죽을 때까지 핍박의 칼을 갈며 죽음의 창을 던졌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시대에도 동일한 원리를 따라 가장 위대하고 의로운 교회의 기둥들이 죽음에 이르는 핍박으로 사라져야 했던 사실을 클레멘크는 서술하고 있습니다. 즉 베드로는 비록 자신의 시기로 인하여 인내의 한계를 몇 번 드러낸 경우가 있었지만, 그는 정치계와 종교계의 불의한 시기로 인하여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리는 순교로 생을 마감해야 했으며, 바울은 사도들과 동족들의 시기로 인하여 인내의 완숙함도 얻었지만 수많은 죽음의 경험들도 감수해야 했다는 것입니다.

클레멘트는 자기가 처한 핍박의 시대를 이렇게 일갈한 후 그것을 극복하는 해법으로 무엇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하시고 온전하고 기뻐하는 뜻’이 무엇인지 분별할 것을 권합니다. 그리고 가장 우선적인 하나님의 뜻은 바로 회개라고 말합니다. 사실 주변에서 벌어지는 불의의 결과로 초래된 핍박과 고난이기 때문에 그들을 고발하고 강하게 저항하는 것이 자연스런 대안으로 제시될 법도 한데, 로마의 클레멘트 주교는 오히려 자신을 돌아볼 것을 권하고 있다는 것이 특이한 점입니다. 이는 다윗이 자식에게 쫓기며 생명의 위협을 받던 억울한 시절에 비루한 시무이가 입에 담을 수도 담아서도 안되는 그런 악담을 다윗에게 퍼부었을 때에 스스로를 돌아보며 그것을 하나님이 시키신 명령으로 여기며 회개의 무릎을 꿇었던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단칼에 문제를 수습할 것을 제안한 충복 아비새와 요압에게 면박을 주면서까지 관여하지 말 것을 당부하며 자신을 먼저 돌아보는 다윗의 신앙에서 클레멘트 주교의 권고는 멀지 않습니다.

교회를 향한 핍박은 지금도 여러 가지 형태로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가정적, 개인적 부문에서 얼마나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지 모릅니다. 확실히 배후에는 사단과 이 세상의 시기와 질투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을 견딜 수 없어하는 무리들의 분노와 격한 숨결이 빚어낸 일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시시비비 따지고 잘잘못을 가리는 것은 타당하고 효과적인 접근법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말 선하고 온전한 접근법은, 이것을 계기로 스스로를 돌아보며 인내의 온전함을 이루며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이 더욱 화려한 빛을 발휘할 수 있도록 더 적극적인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지혜를 추구하는 헬라인과 기적을 갈망하는 유대인의 그럴듯한 유혹이 사방에서 촉수를 내민다 하더라도, 핍박과 고난의 시대는 십자가의 의로운 판단력이 더더욱 요청되는 때입니다. 우리는 지금 클레멘트 주교가 부당한 시기(unrighteous envy)로 말미암아 촉발된 억울한 핍박이 합법적인 방식으로 자행되던 시대에 교회를 향해 ‘이것을 스스로를 돌아보는 회개와 신앙적 진일보의 계기로 삼으라’고 한 권고에 더욱 귀를 기울여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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