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사랑과 진리가 입맞추는 곳입니다. 사랑과 진리의 숨결이 없으면 교회는 죽은 것입니다. 그 죽음은 당장 드러나지 않습니다. 아주 은밀하게, 서서히, 죽었다는 사실도 모르게, 교회의 죽음이 이미 현실로 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을 방지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생명과 마음과 뜻과 힘을 다 동원한 사랑의 수고와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섬김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더 있습니다.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만큼 성경에 계시된 진리 그대로가 교회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붙들려는 몸부림을 보십시오. 그들의 순교는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의 분량과 무게를 잘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비록 원수의 날아오는 칼과 창을 가슴으로 받는 사랑도 행했지만,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그들은 거짓의 아비 마귀의 난동을 저지하는 일에 진리의 검을 사용하는 법도 배우고 익혔습니다.
리용의 장로로 있다가 주교가 된 이레니우스는 폴리캅의 제자로서 당시 교회를 가장 아프게 했던 영지주의(Gnosticism) 이단의 정체를 가장 잘 드러낸 분입니다. 이를 위해 그는 “이단들을 대적하며(Adversus Haereses)” 라는 책을 썼습니다. 거짓의 문제는 진리의 빛 가운데 드러나는 것으로 정복되는 것입니다. 하나의 이단을 정확하게 알고 알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거짓은 진리에 의해서만 드러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짓은 쉽게 발각될 정도로 자체의 벌거벗은 상태를 노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매혹적인 드레스로 영리하게 스스로의 추악함을 가리고 장식하여 진리 자체보다 더 진리 같은(ipsa veritate veriorem) 모습을 취합니다. 심지어 하나님 자신보다 더 탁월하고 궁극적인 어떤 것(altius aliquid et majus)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꾸미기도 합니다. 성경의 적당한 도용은 가장 효과적인 장식품의 하나로 환영을 받습니다.
그리고 거짓은 양파처럼 무수한 껍질로 싸여 있습니다. 만약 거짓이 여러 겹의 가면을 쓰다가 하나를 벗으면 아직도 그 본연의 정체를 드러낸 것이 아닙니다. '이제 속지 않았다'고 생각할 그때에 속을까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사단은 이런 방식으로 속입니다. 마치 거짓이 다 드러난 것처럼 안심하게 만들고 나서, 본격적인 거짓의 일들을 아무런 의심이나 저항도 없이 마음껏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거짓도 빛에 의해서 드러나면 끝입니다. 빛은 그 자체로 어두움의 종말을 뜻합니다. 거짓은 우리가 아는 진리의 빛 분량만큼 벗겨지는 것입니다. 진리에 엄밀하면 그만큼 거짓의 예리한 것까지 벗기고, 넓게 알면 그만큼 두루두루 벗기고, 깊이 알면 뿌리까지 뽑아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당연히 진리에 무지한 자들은 이러한 거짓을 진리에서 분리해 낼 수 없습니다. 진리는 이성의 범주를 훌쩍 넘어서는 것이기에 탁월한 지혜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것만 보아도 거짓과의 싸움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걱정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지혜가 되십니다. 그리고 지금 활동하는 거짓의 아비 마귀는 머리가 밟혀져 있습니다. 제정신을 가지고 정상적인 활동을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 세력이 완전히 사라지고 아무런 영향력도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거짓과 싸워서 지지 않는다는 확고한 보증이 있습니다. 그리고 거짓과 진리가 싸운다고 말할 때, 우리는 거짓이 진리의 수준만큼 높아서 대립항이 될 정도라고 과장하면 안됩니다. 주님은 분명히 ‘내가 세상을 이겼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승부가 가려진 싸움을 싸우고 있습니다. 다만 사단의 세력과 영향력을 미미하게 남겨두신 이유는, 우리가 결국 정복해야 할 것은 거짓의 아비 마귀가 아니라 진리의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임을 알게 하고 그 길로 인도하는 적당한 채찍의 필요성 때문에 두신 것입니다. 이것을 놓치면 우리는 귀신이 쫓겨 나가고 질병이 치료된 것만을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그것은 부수적인 결과일 뿐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의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는 그런 차원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입니다.
거짓과의 싸움도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준비하는 수단처럼 보이는 ‘진리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진실로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초대교회 교부들은 진리이신 그리스도 예수 아는 것을 가장 고상하고 귀한 것으로 여겼으며, 이 지식을 파헤치기 위해 가장 날카로운 지성의 날을 세웠던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제자들을 향해 던진 예수님의 질문을 안경으로 삼아 교부들은 신약과 구약을 생명을 다해서 읽고 연구하고 교회를 위해, 이단을 향해 붓을 들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진리와 거짓의 싸움에서 칼을 뽑아야 하는 상황이 우리로 원수까지 품어야 하는 사랑의 도리마저 희생하게 만드는 부당한 호전성은 단연코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진리의 선한 싸움을 싸우면서 동시에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누구든지 하나님께 돌아오면 일평생 적으로 규정하고 싸웠던 대상이라 할지라도 내 생명처럼 여길 수 있는 사랑을 늘 가슴에 품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긴 교회사 속에서 이 사랑과 진리를 모두 붙들었던 순간들을 찾는다면 안타까운 일이지만 대단히 적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문제가 있다면 사랑도 턱없이 부실한데 진리에 있어서도 위험한 수준까지 변질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사랑과 진리는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교회를 지탱하는 두 기둥 중에 하나는 세워주고 다른 하나의 무너짐은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사단의 전략인 것입니다. 사랑과 진리가 어느 것 하나라도 포기되지 않고 풍성하여, 은혜와 진리가 동시에 충만한 독생자의 온전한 영광을 거룩한 향기로 퍼뜨리는 지역과 시대의 증인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리용의 장로로 있다가 주교가 된 이레니우스는 폴리캅의 제자로서 당시 교회를 가장 아프게 했던 영지주의(Gnosticism) 이단의 정체를 가장 잘 드러낸 분입니다. 이를 위해 그는 “이단들을 대적하며(Adversus Haereses)” 라는 책을 썼습니다. 거짓의 문제는 진리의 빛 가운데 드러나는 것으로 정복되는 것입니다. 하나의 이단을 정확하게 알고 알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거짓은 진리에 의해서만 드러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짓은 쉽게 발각될 정도로 자체의 벌거벗은 상태를 노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매혹적인 드레스로 영리하게 스스로의 추악함을 가리고 장식하여 진리 자체보다 더 진리 같은(ipsa veritate veriorem) 모습을 취합니다. 심지어 하나님 자신보다 더 탁월하고 궁극적인 어떤 것(altius aliquid et majus)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꾸미기도 합니다. 성경의 적당한 도용은 가장 효과적인 장식품의 하나로 환영을 받습니다.
그리고 거짓은 양파처럼 무수한 껍질로 싸여 있습니다. 만약 거짓이 여러 겹의 가면을 쓰다가 하나를 벗으면 아직도 그 본연의 정체를 드러낸 것이 아닙니다. '이제 속지 않았다'고 생각할 그때에 속을까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사단은 이런 방식으로 속입니다. 마치 거짓이 다 드러난 것처럼 안심하게 만들고 나서, 본격적인 거짓의 일들을 아무런 의심이나 저항도 없이 마음껏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거짓도 빛에 의해서 드러나면 끝입니다. 빛은 그 자체로 어두움의 종말을 뜻합니다. 거짓은 우리가 아는 진리의 빛 분량만큼 벗겨지는 것입니다. 진리에 엄밀하면 그만큼 거짓의 예리한 것까지 벗기고, 넓게 알면 그만큼 두루두루 벗기고, 깊이 알면 뿌리까지 뽑아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당연히 진리에 무지한 자들은 이러한 거짓을 진리에서 분리해 낼 수 없습니다. 진리는 이성의 범주를 훌쩍 넘어서는 것이기에 탁월한 지혜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것만 보아도 거짓과의 싸움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걱정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지혜가 되십니다. 그리고 지금 활동하는 거짓의 아비 마귀는 머리가 밟혀져 있습니다. 제정신을 가지고 정상적인 활동을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 세력이 완전히 사라지고 아무런 영향력도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거짓과 싸워서 지지 않는다는 확고한 보증이 있습니다. 그리고 거짓과 진리가 싸운다고 말할 때, 우리는 거짓이 진리의 수준만큼 높아서 대립항이 될 정도라고 과장하면 안됩니다. 주님은 분명히 ‘내가 세상을 이겼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승부가 가려진 싸움을 싸우고 있습니다. 다만 사단의 세력과 영향력을 미미하게 남겨두신 이유는, 우리가 결국 정복해야 할 것은 거짓의 아비 마귀가 아니라 진리의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임을 알게 하고 그 길로 인도하는 적당한 채찍의 필요성 때문에 두신 것입니다. 이것을 놓치면 우리는 귀신이 쫓겨 나가고 질병이 치료된 것만을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그것은 부수적인 결과일 뿐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의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는 그런 차원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입니다.
거짓과의 싸움도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준비하는 수단처럼 보이는 ‘진리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진실로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초대교회 교부들은 진리이신 그리스도 예수 아는 것을 가장 고상하고 귀한 것으로 여겼으며, 이 지식을 파헤치기 위해 가장 날카로운 지성의 날을 세웠던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제자들을 향해 던진 예수님의 질문을 안경으로 삼아 교부들은 신약과 구약을 생명을 다해서 읽고 연구하고 교회를 위해, 이단을 향해 붓을 들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진리와 거짓의 싸움에서 칼을 뽑아야 하는 상황이 우리로 원수까지 품어야 하는 사랑의 도리마저 희생하게 만드는 부당한 호전성은 단연코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진리의 선한 싸움을 싸우면서 동시에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누구든지 하나님께 돌아오면 일평생 적으로 규정하고 싸웠던 대상이라 할지라도 내 생명처럼 여길 수 있는 사랑을 늘 가슴에 품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긴 교회사 속에서 이 사랑과 진리를 모두 붙들었던 순간들을 찾는다면 안타까운 일이지만 대단히 적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문제가 있다면 사랑도 턱없이 부실한데 진리에 있어서도 위험한 수준까지 변질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사랑과 진리는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교회를 지탱하는 두 기둥 중에 하나는 세워주고 다른 하나의 무너짐은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사단의 전략인 것입니다. 사랑과 진리가 어느 것 하나라도 포기되지 않고 풍성하여, 은혜와 진리가 동시에 충만한 독생자의 온전한 영광을 거룩한 향기로 퍼뜨리는 지역과 시대의 증인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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