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13일 일요일

마지막 원수는 사망이다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는 사망이라 (고린도전서 15:26)

부활이 없다는 일부의 도발적인 주장에 흔들리고 있는 고린도 교회를 견고히 세우고 격려하는 문맥에서 지나가듯 언급된 구절이다. 본문에 따르면, 사망이 삼키운 바 되는 때는 맨 나중이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제거되지 않는 원수라는 뜻이기도 하다. 뒤집어서 보면, 지금은 사망의 위력이 왕성한 때라고 이해해도 되겠다. 실제로 예나 지금이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음에의 종노릇 멍에에서 자유로운 적이 없었다. 사회에나 교회에나 멀쩡하게 살다가도 생계에 위협이 가해질 분위기가 조성되면 본성적 직관에 가까운 속도로 스스로를 검열하고 절제하며 몸을 움추리고 동태를 살핀다. 목숨이 달아나지 않을 생존의 틈새를 찾기 위해서다.

반면 믿음의 사람들은 희롱과 채찍질과 결박과 투옥과 죽음의 투석과 톱질 및 짐승과 더불어 썩어가는 가죽옷 착용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히브리서 기자는 기록한다. 세상적인 가치관의 지축을 뒤흔드는 이러한 용맹의 원인은 그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아서"다. 그 증거는 "더 좋은 부활'로 요약된다. 이를 위해서는 억울하고 사악한 참수형도 구차히 면하려고 하지 않았단다. 이러한 믿음의 사람들이 생명의 피를 쏟으며 마지막 호흡을 떠밀어 우리에게 내뱉은 한 마디의 증언은 '더 좋은 부활'이 있다는 거다.

바울은 부활의 의미를 두 가지로 구분한다. 하나는 그게 없으면 우리를 온 인류에서 가장 비참한 자(ἐλεεινότεροι πάντων ἀνθρώπων)로 만드는 게 부활이며, 다른 하나는 그 부활이 사망의 결박과 위협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아담과 그리스도 사이의 관계를 죽음과 부활의 관계로 설명한 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가진 자랑은 자신이 "날마다 죽는다"는 것이라고 '자랑'한다. 부활은 오늘의 고통을 인내하며 '나중에 잘 되겠지'란 보상심리 차원에서 마지못해 복용하는 진통제가 아니다. 그 이상이다.

부활은 우리의 자랑이다. 가장 비참한 듯한 인생을 살지만 가장 큰 영광의 핵심이기 때문이고, 죽음의 날카로운 사슬에 얽매여 종노릇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는 갇힌 인생의 해방구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싸워야 할 모든 원수들 중 맨 나중에 멸망으로 처리될 원수가 사망이라 한다면, 마지막 순간까지 승리할 수 있는 우리의 유일한 무장은 부활이다. 그래서 성도의 삶은 부활이 핵심이다. 그러나 부활의 삶 노른자가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역설적인 어구로 진술되고 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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