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27일 일요일

생명보다 나으므로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시63:3)

생명은 천하보다 귀하댔다. 이런 생명의 소중함은 그것이 제거될 때에 모든 것들이 소멸되고 만다는 사실에서 다시 확인된다. 확실히 죽음은 일반은총 전체의 종식이다. 그래서 다른 모든 댓가를 지불한다 할지라도 피하고 싶어하는 두려움과 근심의 인류 보편적인 원흉이다. 그러나 그런 생명도 하나님의 인자 앞에서는 상대적인 것으로 분류된다. 우리의 합리적인 상식이 마비되는 지점이다. 보다 편하고 근사한 인생을 일평생 추구하고 생명의 연장을 다른 모든 가치들에 우선하는 것으로 판단하는 우리에게 그런 판단의 즉각적인 중단을 요청하는 말씀이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낫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경건조차 이익의 방편으로 이용하는 분들에겐 더더욱 배알이 뒤틀리는 말이겠다.

본문은 우리에게 성경의 모든 '모순'과 '혼돈'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위에서 풀어진다 했던 루터의 심장이 급히 박동하게 만드는 구절이다. 천지에서 가장 소중하신 분이 육체의 몸으로 오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자신의 생명을 수단으로 삼으셨다. 이로써 땅에서의 모든 으뜸가는 가치들의 총합을 가지고도 설명할 수 없도록 측량을 불허하는 무게의 가치가 인생에게 주어졌다. 피조물에 의해서는 그 어떤 최첨단 저울로도 측량이 불가능한 삶의 지고한 가치가 주어진 배후에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이 있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되겠다. 이유는 피조적 가치의 총합 이상으로 높아진 인생의 가치에만 초점을 맞추면 십자가의 의미는 절반으로 삭감되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주님의 죽음으로 지고의 가치가 부여된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 나아가 그리스도 예수를 섬기고자 할 때에 그런 섬김의 원리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의 방법론에 대한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죽지 않으면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머물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지극히 일상적인 관찰에 투영된 삶의 원리가 십자가의 또 다른 절반이다. 주님을 따르고자 한다면, 구원을 받았다는 희열을 넘어 그러한 구원으로 부름을 받은 자들이 마땅히 살아가야 할 삶의 원리로서 죽음조차 수단으로 삼아 주의 인자를 증거하는 지복의 차원까지 이르러야 하겠다. 바울은 날마다 죽는다를 외치며 살았다. 예수님을 뒤따라, 사망은 내게 생명은 너희에게 역사하는 인생을 질주했다. 일평생 주는 자로 살아가되 생명도 기꺼이 내어주는 인생을 경주했다. 주께서 걸어가지 않으신 '휴거'의 방식보다 주님처럼 죽음에서 '부활'에 이르기를 원할 정도였다.

바울의 그러한 삶은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귀하다는 확신이 없다면 단 한걸음도 내디딜 수 없는 삶이었다. 시인도 바울과 동일한 판단에 익숙했던 것을 본다면, 진리의 본질에 있어서 신구약은 아무런 차이가 없으면 명료함과 경륜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곁다리 교리도 확인하게 된다. 살인과 자살이란 개념들이 거북하고 섬뜩한 살기를 광적으로 구현하는 현시대에 죽음이 수단으로 요구되는 생의 보다 높은 목적과 원리가 있다는 목소리의 공적인 출고가 분명 쉽지는 않은 일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의 죽음으로 주께서 보이신 삶의 가치와 원리는 복음의 노른자다. 하여 그리스도 예수와 그가 달리신 죽음의 십자가 외에는 알지도 자랑치도 않겠다는 바울의 확고한 고백이 나에게도 목젖을 털고 즐거이 출고되는 날이 오기를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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