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30일 수요일

작은 영웅들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출32:32)

이 구절에서 하나님이 확고히 정하신 뜻의 불변성이 아니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신적인 뜻의 유연한 가변성을 떠올리는 분들도 계시겠다. 생명책에 이름을 기입하고 지우는 것은 우리의 행동거지 정도에 달렸다는 추정을 지나 구원의 여부가 우리 개개인이 자기하기 나름이란 '합리적 궤변'으로 직행하는 것도 그리 무리는 아니겠다. 이는 사실 우리의 성정에 어떠한 갈등이나 주저함도 없이 쫘악 달라붙는 친숙한 사유의 흐름이다. 오히려 이에 대한 반론과 저항이 우리에겐 낯설고 거북할지 모르겠다.

다윗과 바울도 모세와 유사하게 '생명책 삭제' 멘트를 내뱉었다. 마치 영생의 여부가 나의 결정에 달렸다는 인상을 솔솔 풍기듯이 말이다. 이와 유사한 구절들을 바글바글 긁어모아 성도의 이름은 철필이 아니라 연필로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어서 하나님의 심기가 틀어지면 얼마든지 삭제될 수 있으니까 까불지 말라는 가당치도 않은 협박용 카드로 악용하는 사례도 종종 발견된다. 목회를 성공으로 이끌고 성도들의 주머니를 털어 짭짤한 소득만 올릴 수 있다면 소설도 가히 흉내낼 수 없는 면죄부 발부와 매매도 '적법한 제도'로 둔갑하는 일들이 교회사의 갈피마다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

나는 본문을 읽으면서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하신 계명이 떠올랐다. 전적인 은택으로 택함을 받아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 영원토록 주님과 함께하게 된 최고의 복마저도 수단으로 삼을 정도로 백성들을 사랑하는 모세, 하나님의 백성이 광야에서 암울한 최후를 맞이하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에는 치명적인 흠이 생길지도 모를 가능성과 맞서서 자신이 활용할 수 있는 마지막 카드라고 할 영생마저 소모적인 방편으로 과감히 내던지는 모세의 결연한 사랑과 희생이 보여서다. 이렇게 모세는 '처럼'이란 몸의 수단성을 넘어 영생조차 수단으로 여길 정도로 하나님의 사람들을 사랑했던 거다.

이는 모세와는 비교할 수 없도록 고귀하신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자기를 비우고 종의 형체를 입으신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지시는 구원의 수단으로 생명까지 내어주신 사랑의 전혀 손색이 없는 구약적 모델이다. 이런 지도자가 목마르다. 그러나 어떤 대리만족 차원의 출중한 영웅을 기다리는 것보다 우리 각자가 작은 영웅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성경의 요청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삽비라와 아나니아 정도의 헌신 앞에서도 실천의 손이 떨리는데 어찌 모세의 모델을 감히 넘볼 수 있느냐는 반론이 각자의 목젖에 매달려 출고를 기다리고 있다는 거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성경이 분명히 기록하여 알도록 의도한 모델이고 이로써 그런 수위의 섬김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면 우리의 육신적 형편을 기준으로 가부를 결정하지 않고 거기까지 이르도록 용기와 지혜의 은총을 배푸시는 주님께 구하는 태도가 마땅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은혜로 말미암아 모세의 섬김은 과히 감동의 언덕을 지나 예술의 고매한 경지까지 등극했다. 세상의 기본적인 지탄만 모면해도 좋겠다는 척박한 기독교의 현실에 관념의 헛스윙질 같은 소리일 수 있겠으나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라는 실 한 오라기의 희망마저 묵살할 필요까진 없겠다. 꺼져가는 불도 끄지 않으시는 주님의 소망보존 의지를 믿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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