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15일 화요일

하나님과 같이 되었다?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창3:22)

하나님은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하시었다.
이에 사단은 뱀의 옷을 취하고 하와에게 다가와
'너희가 결코 죽지 않을 것이라'며
하나님의 계시된 뜻과 정면으로 대립되는 반론을 개진했다.
사단은 불순종의 길을 앞서간 선배요
그런데도 죽지 않았다는 반론의 '산' 증인으로 그리한 것이었다.

당연히 사단이 하와의 대화 상대자로 서 있다는 것보다
더 확고한 증거와 설득력이 없었겠다.
불순종의 첫발을 내디뎌도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 호흡하며
대화하고 있는 사단을 보면 선악과를 따먹어도
죽음의 시커먼 운명이 그 결과일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도 분명하여
그녀에겐 더 이상의 구차한 의심과 논박이 필요하지 않았다.
곧장 불순종에 굶주린 손을 뻗었고
모든 감각들의 경쾌한 만장일치 속에서 '죽음'의 실과를 취하였다.

그러나 죽지 않는다는 '사실'은 불순종의 소극적인 이유였을 뿐이다.
그것이 이유의 전부라고 한다면 '그럼 먹어도 되겠네' 정도였을 것이지만
하와의 눈에 선악과는 그런 정도의 실과가 아니었다.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였다.
보다 적극적인 결정적 이유가 있어서다.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것.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어서 완전하고 절대적인 자유를 가지신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건
선악과 자체의 물리적인 당분이 제공하는 맛의 세계와는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사단이나 인간이나 이 맛에 한번 중독되면 해어나질 못한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저희가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와 같이 되었다고 하신다.
주께서 사단의 반론에 항복의 백기를 든 듯한 발언이라 당황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과 능력과 자존과는 무관한 언사다.
이사야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에 해당한다.
가인에게 하신 '죄의 소원이 네게 있다'는 말씀에 비추어 보면
'하나님과 같이 되겠다'는 건 본성의 DNA처럼 본성적인 기호로 굳어졌다.
불순종은 법의 위반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되겠다는 소원의 발로였다.
선악의 기준과 판단을 하나님께 양도하지 않겠다는
피조물의 발자욱이 찍혀서는 안되는 '신적 행보'의 일환으로 저질러진 일이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이신 것처럼
하나님의 뜻이 나의 뜻이 되고 아버지의 소원대로 되게 해달라는 것은
창조 당시의 피조물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는 유일한 길을 보이신 것이라 사료된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을 먹는 게 제대로 사는 거다.
임의로 더하고 빼는 '하나님과 같은' 행실을 버리고 말씀하신 그대로 취하는 삶!
본성의 기호를 꺾고 하나님의 뜻 그대로를 내 뜻으로 삼는 삶 말이다.
놀랍게도 그 뜻은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이루는 방식으로
그분의 본성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베드로는 귀띔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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