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17일 목요일

계시 의존적인 사색

가슴 속의 지혜는 누가 준 것이냐 마음 속의 총명은 누가 준 것이냐 (욥38:36)

사태의 본말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호소할 수 있는 합리적인 사유의 틀은 변화, 운동, 혹은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힘을 분석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중적 인과율에 주로 의존한다. 이는 모든 사물과 사태에는 발생을 결정하는 형식적 원인(causa formalis), 재료가 되는 질료적 원인(causa materialis), 결과를 야기하는 힘으로서 유효적 원인(causa efficiens), 그리고 목적을 의미하는 궁극적 원인(causa finalis)이 있다는 생각에서 나온 도식이다. 어떤 지식이 객관성과 타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사중적 원인은 해명해야 한다는 게 상식이다.

성경의 인문학적 연구는 주로 사중적 인과율이 충족되는 선까지 추구한다. 이를 위해 육하원칙, 무게, 질량, 부피, 압력, 색깔, 촉감, 밝기, 온도, 위치, 속도, 시공간적 인접성 등을 꼼꼼하게 살핀다. 이러한 단위들과 층위들의 촘촘한 그물망에 걸러진 지각의 건데기를 근거로 추론에 들어가고 구성과 재구성을 거듭한다. 물론 지각 자체가 사물과 사태의 순수한 내용을 확보하는 게 아니라 이미 구성적인 속성이 내재되어 있어 객관성의 토대가 흔들리는 태생적 한계를 가졌다는 사실도 지적할 수 있겠다. 영혼과 의지의 방향 자체가 이미 객관성 상실의 원흉이란 지적은 더욱 기분 구겨질 일이겠다.

인간이 소유주로 간주되고 모두가 그걸 공감하는 가슴 속의 지혜와 마음 속의 총명은 사중적 인과율을 마르고 닳도록 적용해도 그 출처가 벗겨지지 않을 대표적인 사례 되시겠다. 우리가 지혜와 총명의 주인이 아니라는 듯한 문제제기 자체가 우리에겐 낯설고 거북하다. 우리 자신보다 우선하는 지혜와 총명의 근원이 있다면, 보이지도 않고 인과의 지문이 전혀 채취되지 않는 무형, 무취, 무색, 무감의 세계이며 아무리 날카로운 지각의 촉수를 뻗어도 접지할 수 없을 영역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지각을 나노(nano)의 세계보다 정밀한 피코(pico)와 펨토(femto)의 세계를 넘어 아토(atto, 10의 마이너스 18승) 세계의 변화까지 읽어내는 수준까지 넓힌다고 할지라도 그 영역은 여전히 이방인의 느낌에서 해어날 수 없는 지점이다.

하나님은 욥에게 지금 지혜와 총명의 원인을 물으신다. 무수한 물음의 벡터처럼 서두에 제시된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는 추궁이 전두엽에 말린 욥의 지성을 더욱 뒤틀리게 만들었을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과 쟁변하려 할지라도 천의 물음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한다'는 스스로 내뱉은 고백의 실상을 절감했을 것이다. 욥은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고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했다'는 백기를 들고서야 비로소 진정한 지식의 세계에 첫발을 내딛는다. 아름답고 향기로운 장면이다.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차는 참으로 천양지차 수준이다. 계시 의존적인 사색의 필요성과 탁월성이 또 다시 겸손을 추궁하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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