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17일 목요일

성경 해석학

어떤 분이 질문을 하셨어요. 성경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해석하는 방법과 도구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1. 영원토록 살아계신 하나님이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 성경의 주어라는 사실은 성경 해석학의 등뼈와 같습니다. 고의든 망각이든 이 사실이 생략되면 아무리 성경의 무오성을 엄밀한 차원까지 고수했다 할지라도 성경은 고문자와 역사적 정보와 윤리적 처세술의 문헌적인 출처일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이 비록 인간의 머리에 적응된 것이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계시라고 한다면 하나님에 의한 계시이며 하나님에 대한 계시이며 하나님을 위한 계시이기 때문에, 만약 지금 살아서 말씀하고 계신 하나님이 빠진다면 그 해석학은 인간 문맥에서 걸러지는 유한한 가치에만 매달리는 해석학적 퇴락을 초래하고 말 것입니다. 이는 제도권 속에서 신학의 전방위적 훈련을 받으신 분들도 때때로 놓치는 부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2. 성경의 중심에 하나님이 주어와 내용과 목적으로 계시다는 사실이 전제되면 그것에 상응하는 방법의 선별이 차순위가 될 것입니다. 저는 "부분과 전체의 선순환적 통합"이란 접근법을 권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펼칠 때 접하게 되는 부분들은 단어, 구절, 문장, 절, 장, 권, 구약, 신약 등일 것입니다. 시간에 있어서도 시간, 날, 월, 년, 시대, 규범적 계시사와 일반사 같은 부분들을 만납니다. 전체에 해당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할 신구약 전체이며 하나님의 역사라 할 인류사 전체일 것입니다. 선순환적 통합이란 부분과 전체가 서로 보완적인 관계로 영향을 서로 주고받는 유기적 관계성을 지녔다는 뜻입니다. 어떤 분들은 부분에 대한 인문학적 해석에 만족의 환호성을 지르고는 더 깊은 뜻으로의 광범위한 탐구를 중단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마다 설정한 문맥의 규모에 충실하고 정직성을 기한 해석일 것이라는 진정성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남습니다. 다른 분들은 신구약 전체를 아우르는 교리의 단단한 뼈다귀만 씹으면서 성경의 오묘하고 세미한 디테일을  물렁물렁 하다며 가소롭게 여깁니다. 그런 분들은 방향과 속도만 있는 안타까운 자동차와 같습니다. 전문성 혹은 전공이란 이름으로 그런 부분이나 전체의 일방적인 해석학에 면죄부를 주는 제도적인 환경의 혁신도 문제지만 환경이 받쳐주지 않더라도 각자의 필요를 스스로 해소하는 노력이 개인별로 경주해야 할 때인 듯합니다.

3. 부분을 다루는 해석학적 수단들은 성경을 히브리어 헬라어로 부지런히 꼼꼼하게 반복해서 읽되 기존의 좋은 주석들을 대화 상대자로 곁에 두는 것입니다. 주석의 종류도 문법적 주석, 상황적 주석, 어원적 주석, 심리적 주석, 역사적 주석, 비평적 주석 등 대단히 많아 선별하는 일이 만만치 않습니다. 사실의 객관성 확보가 요구되는 경우에 참조하는 것이 좋을 듯하고 보다 주목할 신학적 주석으로 존 칼빈, 매튜 헨리, 존 길, (그리고 제네바 바이블) 등과 지금 계속해서 간행되고 있는 교부주석 시리즈와 종교개혁 주석 시리즈 등을 권하고 싶습니다. 조금 더 열심을 내자면, 교부들이 성경을 권별로 주석한 것들 중에 성경을 있는 그대로 가장 잘 보존한 주석들을 선별하고 종교개혁 및 정통주의 시대에 저술된 탁월한 권별 주석들을 66권 엄선해서 필요에 따라 조언자로 두고 성경을 읽으시면 좋을 것입니다. 이 부분은 나중에 제대로 건드리고 싶은 과젭니다.

4. 전체를 다루는 해석학적 도구들은 성경의 핵심 주제들을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모아서 한 구절의 의미가 다른 구절에 의해 제어되는 방식으로 분석하여 성경의 한 이오타도 가감되지 않고 성경이 말하는 만큼 말하고 성경이 말했으면 간과하지 않고 성경이 말하지 않는 침묵의 경계는 함부로 범하지 않도록 체계적인 틀에 담아 성경의 통합적인 의미가 고스란히 존중되는 목적을 지향한 교의학이 아닐까 싶습니다. 추천하고 싶은 교의학적 문헌들은 20세기 헤르만 바빙크의 [개혁교의학], 17세기 프란시스 튜레틴의 [변증신학 강요 (영역본)], 17세기의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 16세기 칼빈의 [기독교강요], 그리고 4-5세기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 등이 있습니다. 각 시대마다 신앙의 분기점을 마련한 문헌이기 때문에 21세기의 세기적 상대성을 극복하고 우리 시대의 과제도 인지하고 해소시킬 통찰력과 대안을 선사할 소중한 유산이 아닌가 싶습니다.

5.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말씀의 영원성과 보편성을 놓치면 안됩니다. 이는 청중과 관계된 것으로서, 말씀은 영원하며 세상 끝까지 이른다는 사실에서 성경의 청중은 특정한 민족이나 지역이나 시대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에 동의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 한 구절을 해석할 때에 세상 모든 사람들의 귀를 의식하며 그 구절의 의미가 땅끝까지 이르도록 나아가 세상 끝날까지 이르도록 규모와 분량 면에서 임의적인 잣대로 제한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특수한 상황에 있는 특정한 개인들을 위한 적용의 구체성을 희생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해석의 보편성과 적용의 구체성은 충돌이나 대립이 아니라 보완과 조화의 관계를 갖습니다. 그래서 어느 하나도 놓쳐서는 안됩니다. 믿음의 선배들이 규명한 진리의 보편적 내용들은 과거라고 해서 불필요한 퇴물로 여기거나, 우리의 형제로 아직 만나지 않은 미래의 지체들과 무관한 해석에 천착하는 일도 합당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택한 백성들을 의식하는 해석의 규모는 우리의 지켜야 할 과젭니다.

6. 하루하루 쉬지 않고 말씀과 씨름하며 해석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방법은 말씀을 (가능하면 원문으로) 읽으면서 묵상하고 교의학적 주석적 문헌들을 참조하며 계속해서 해석하는 것이 좋습니다. 단순히 머리 속에서 무형의 해석으로 남는 것보다 언어의 옷을 구두와 문자로 입히는 것이 더 좋습니다. 이렇게 하기를 죽을 때까지 하는 것입니다. 꾸준히 발전하게 될 것입니다. 하루하루 조금씩... 자신의 해석에 어떤 단절적인 질적 비약을 기대하는 것은 정도가 아닙니다. 물론 그런 일들이 특별한 은총으로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할 필요는 없지만 요행의 부작용이 사소하지 않습니다. 해석의 진일보는 하루하루 성실하고 진실하고 정직하게 주님과 동행하는 것과 무관할 수 없습니다. 공부는 머리가 아니라 엉덩이로 하듯이 진리의 깨달음은 그에 걸맞은 속성대로 전인격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설겆이도, 심부름도, 운동도, 봉사도, 호흡도, 존재도 해석의 도구로 요청되고 있습니다.

7. 진리의 깨달음과 전달은 사람들의 몫이 아니라는 겸손이 해석학적 독선의 결박을 느슨하게 만듭니다. 진리의 규모는 너무도 깊고 높고 넓고 길어 한 사람의 짧은 일대기로 쉽게 커버될 분량이 아닙니다. 땅의 시간이 종결되는 마지막 순간까지 진리는 하나님 자신이며 하나님께 속하였고 인간에 대한 그 진리의 적응적인 계시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한 시라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진리를 알았다고 해서 자랑할 수도 없고 분량과 차원에 있어서 다 알았다고 말할 수도 없고 당연히 뻗뻗한 목과 거만한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건 가당치도 않으며 타인의 해석에 비판의 손가락을 거누고 정죄의 독설을 퍼붓는 것도 부당한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해석의 정통성은 인격과 태도와 언어와 행실로 계속해서 입증하고 판단은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진리의 빛은 주먹질이 없어도 거짓과 오류의 어둠을 몰아내는 속성을 가졌다는 사실을 믿으면서 말입니다.

이 정도의 기본기만 존중해도 성경의 진리를 크게 훼손하는 일은 방지할 수 있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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