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17일 목요일

선지자의 눈과 선견자의 머리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리워 지리라 (사29:14)

지혜와 총명의 부재가 주께서 조치하신 형벌의 내용으로 진술되고 있다는 사실이 눈길을 끈다. 원인은 무엇일까? 하나님을 향한 백성들의 태도가 입술의 형식적인 존경이 전부였고 마음은 아득히 멀어졌기 때문이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지 못해서다. 백성의 마음이 멀어진 직접적인 원인은 그들의 여호와 경외함이 사람의 계명으로 인한 가르침에 그 뿌리를 내려서다. 이는 단순히 말과 행실의 표리부동 문제도 아니고, 머리와 가슴의 따로국밥 상태를 꼬집은 것도 아니다. 행실의 경건도 화려하고 가슴의 종교적 온도도 뜨거울 수 있겠으나 그 뿌리가 인간의 가르침에 있다는 출처의 부실에 대한 지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 가르침을 주신다. 이사야도 밝히듯이, 하나님은 우리에게 '적당한 방법,' 때로는 몽둥이로 때로는 막대기로 당신의 백성을 '적당히 견책'하며 이끄신다. 진노의 막대기요 분한의 몽둥이로 쓰인 난폭한 앗수르와 교만한 바벨론이 대표적인 사례겠다. 정복과 항복의 거친 역사가 세계사의 상당한 지면을 채우고 있는 것도 이런 섭리사적 문맥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사나운 광풍의 시대 끝자락에 지혜와 총명을 겸한 인물들을 세우셔서 고요한 호수의 평화를 이루시고 보다 깊은 가치에 대한 갈증을 일으키며 주님과의 깊은 질적 교제의 환경도 베푸신다. 이처럼 하나님은 사람들을 통해 형벌과 축복의 무수한 교차를 이끄신다.

그러나 인간적 가르침의 수단성을 목적과 영광의 종착지 개념으로 대체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되겠다. 사람은 두려움의 대상도 추종이나 숭배의 대상도 아니기 때문이다. 적당한 견책 차원에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인위적 환경은 지나가는 수단이다. 당연히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란 목적만 달성하고 지나가야 한다.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 수단은 하나님의 쓰심을 입었다는 영광으로 이미 만족이고, 백성들은 그 수단을 장중에 붙드시고 임의로 쓰시는 하나님께 소급해 올라가야 한다. 수단이란 인과의 중턱에 머물면 그들의 하나님 존경과 경외가 아무리 뜨겁고 진실해도 입술의 분주한 형식일 뿐이라는 평가를 모면하긴 어렵다.

주님은 자신의 영광을 다른 피조물에 한번도 양도하신 적이 없고 양도할 의사도 없으시다. 우리는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과 본질상 어울리는 않는다. 우리의 믿음이 사람들의 교훈에 정박해 있으면, 하나님은 지혜자의 지혜와 명철자의 총명을 가리시고 치우신다. 인간 의존적인 마음을 가지면 성경을 읽어도 '나는 무식하다' 고백할 수밖에 없어진다. 그에게는 주께서 선지자의 눈을 감기시고 선견자의 머리를 덮으시기 때문이다. 역사 속에서 믿음의 거인들의 발자취를 추적하는 것은 사람의 교훈이 목말라서 학구적 광기를 부리는 게 아니다. 주께서 때때로 선지자의 눈과 선견자의 머리를 여셔서 하나님의 교훈이 화려하게 꽃피운 시대를 목격하며 하나님의 도도한 견책의 역사를 더듬기 위해서다. 혹 지금은 가리워져 있으나 그 시대에는 보이셨을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 시대를 조명하기 위해서다.

지혜와 총명의 봉쇄가 이사야의 문맥에서 보면 분명 재앙이요 형벌이다. 그러나 이면에는 축복과 소망이 역동한다. 사람의 가르침에 뿌리를 둔 형식적인 경건의 득세와 창궐을 방치해 두시는 게 더 무서운 재앙이요 형벌이기 때문이다. 그런 형벌과 재앙의 카드를 뽑았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섭리적 개입과 주권적 사랑의 증거이기 때문에 무지와 우매의 캄캄한 어두움이 세상을 덮더라도 이를 지혜와 총명의 전적인 소멸로 보아서는 안되겠다. 살다가 보면 형광등이 꺼져 사방이 캄캄함에 뒤덮히는 때가 있다. 형광등의 수단성을 깨달으면 되겠다. 하나님이 영원토록 우리에게 지혜와 총명의 빛이 되신다는 사실의 후레쉬한 환기 차원에서 신적인 사랑의 숨결을 흡입하는 때라고 여기시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난 주변에 눈부신 형광등이 너무도 많아 어찌할 줄 모르겠다...거인들의 틈새에 낀 유쾌한 새우등 신새랄까...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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