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24일 목요일

악의 문제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악(malum)도 창조한다 (사45:7)

이는 궤변의 달인들이 하나님을 악의 출처 내지는 악의 저자로 떳떳하게 규정하는 성경적 근거로 입맛을 다지는 구절이다. 악의 문제는 젊은 어거스틴 발걸음을 키케로의 충동과 마니교의 이원론적 늪으로 빠져 들게 했던 주제기도 하다. 허나 마니교의 이원론은 악의 문제를 푸는 열쇠가 아니었다. 결국 그는 주께로 돌아와 어두움이 어떤 실체가 아니라 빛의 결핍이듯 악도 어떤 실체(substantia)가 아니라 선의 결핍(provatio boni)이란 개념에 도달한다. 이는 유희용 관념이 아니라 현실 설명력이 너무나도 높은 관찰이다. 그러나 히틀러의 경우, 사람들은 그를 선의 결핍이란 소극적인 이미지로 이해하지 않고 적극적인 악의 원흉으로 규정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이는 인간의 주체성과 독립성을 지나치게 높이는 해석이다. 오히려 히틀러와 같은 인물조차 '선'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큰 것이며 '선의 결핍'은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일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증인으로 봄이 훨씬 실상에 가깝다.

칼빈은 이 구절을 죄나 악의 근원이나 기원과 직결된 본문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본문에서 '악'이 선이 아니라 '평안'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대조되고 있어서다. 여기서의 '악'을 고난이나 전쟁이나 어떤 고통스런 내용들을 일컫는 것으로 간주하며, 칼빈은 당시 통용되던 구분(vulgaris distinctio)을 따라 하나님을 죄의 저자가 아니라 형벌의 저자(autorem non culpae sed poenae)라고 하였다. 지혜자의 기록처럼,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라는 맥락에서 하나님은 모든 것을 때에 따라 아름답게 지으셨고 모든 것들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시되 악인조차 악한 날에 적당하게 지으셨다. 죄악을 저지르는 것 자체가 이미 형벌의 성격이 있다는 로마서의 문맥도 고려해 볼 일이고, 세상에서 죄의 출입이 이루어진 근원과 관련하여 한 사람의 불순종이 그 원흉으로 지목되고 있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할 대목이다.

나는 악의 문제를 생각할 때마다 성경의 보다 명백한 본문으로 애매하고 난해한 본문을 푸는 성경의 자기해석 원리를 선호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행하심을 그의 성품에 근거해서 이해하는 순서도 최대한 존중한다. 성경의 가장 명백한 선언은 하나님이 선하시고 거룩하신 분이라는 사실이다. 천지창조 이후에 하나님이 그 모든 만드신 것들을 신적인 안목으로 보시고 '심히 선하다'고 평가하신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선하신 분에게서 선한 것들이 나오는 건 지극히 합당하다. 같은 맥락에서 사람들도 하나님은 정직하게 지으셨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 문맥에서 일어나는 불행과 고통과 아픔과 눈물과 절망과 슬픔과 고독과 범죄와 재앙과 같은 악들이 하나님의 섭리 바깥에서 벌어지는 우발적인 사건들이 아님도 분명하다. 스스로를 부인할 수 없으신 하나님의 불변성에 근거해서 본다면, 하나님의 영원한 선하심은 시간 속에서 변경되지 않는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속성과 성경의 분명한 사실들에 근거하여 우리는 하나님이 죄나 악의 저자가 아니라고 분명히 선언할 수 있겠다. 오히려 심술궂은 악의 저자가 아니라 인간의 악조차 선으로 바꾸시는 지극히 선하신 분이시다. 악조차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 쓰시는 이유는 '정녕 죽을 것이라'는 즉각적인 진멸을 접으시고 길이 참으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에서 비롯된다. '악한 일에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으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기에 마음이 담대하게 된다'는 사실도 아시지만 길이 참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본 후 '해 아래서 하시는 일을 사람이 능히 깨달을 수 없도다'는 전도자의 고백이 심히 정직하게 들리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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