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19일 토요일

은혜의 충만 속에서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요15:10)

예수님의 말씀이다. 율법의 완성이라 할 사랑에 도달하는 원리가 조건문 형태로 제시된 구절이다. 요한복음 15장을 비롯하여 성경의 상당한 지면이 이런 조건문 계명으로 채워져 있다. 당연히 묵상의 시간마다 순종과 보상, 불응과 형벌 구조가 의식으로 전이되고 그 전이는 해석학의 골격과 삶의 준거틀로 굳어지는 단계까지 서서히 진행된다. 말씀과 동행하는 삶의 전형적인 모습은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깨닫고 순종하는 유형을 취한다는 것에 이의가 없다. 이는 분명 주님께서 명하신 것이며 기뻐하실 명령의 결과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에 율법적 성과주의 불청객의 출입을 주님께서 허하시는 듯한 오해가 불식되지 않으면 기독교의 삶에 치명적인 왜곡이 빚어질 수 있겠다는 긴장은 필요하다. 

요한복음 15장은 성화의 부실이 구원의 취소까지 유발할 수 있다는 극단적인 주장의 근거로 거론되는 경우도 있으나, 주로 구원보다 성화의 열매를 주목하는 본문으로 이해된다. 여튼 본문을 펼치는 우리의 머리에는 구원의 무조건적 은혜와 성화의 조건적인 성취라는 개념이 곧장 투입된다. 그리고 대체로 15장은 성화의 조건적인 성취 개념의 정당성에 예수님의 최종적인 권위가 실린 종지부를 찍는 텍스트로 채택된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듯한 말씀 한 소절이 즐비한 조건문들 틈 사이에서 발견된다. 16절,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일단 구원의 출처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른 선택에 있단다. 그리고 정하여진 구원의 선택이 세상 끝날까지 폐하여질 수 없다는 건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님의 준엄한 약속이니, 하나님께 속한 구원을 인간적인 판단의 입술로는 왈가불가 마시라.

그리고 16절 후반부는 성화와 연결된 표현으로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을 항상 있게 하여'가 이어진다. 우리에게 맺어지는 과실의 주체가 우리 자신이 되는 형식을 정하시고 그 과실이 실제로 우리를 통해 맺어지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며, 그 과실의 지속성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란 사실이 고스란히 계시된 대목이다. 이런 문맥은 이미 요한복음 1장에 요약되어 나타난다.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 권세를 누리는 삶이라는 내용은 '믿는다'는 조건에서 흘러나온 결과가 아니라, '이는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주께서로 난 것'이라는 보다 근원적인 샘에서 비롯된 것이다. 요한복음 이해의 결정적인 열쇠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을 그 근원으로 두었다는 사실이다. 믿음과 구원과 성화 구절들이 단독으로 언급되는 경우에도 이 사실에 입각하여 이해하지 않으면 인간의 순종과 불순종 여부가 전면에 부각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당연히 이 사실이 생략되면, 시공간 속에서 발생하고 등장하는 여러 부수적인 2차 원인들이 과도한 존재감을 발휘하며 궁극적인 근원에 돌려야 할 영광에 불법적인 군침을 흘리며 가당치도 않은 영광 탈취전을 벌일 가능성이 짙어진다. 내가 믿었고 내가 순종했고 내가 노력하고 땀흘린 결과를 내가 마땅히 취한다는 자기 중심적인 맥락에서 비록 입술은 '주님께 모든 영광을 돌린다'일 수 있겠으나 우리의 중심에는 주님께 그런 입술의 표현형 정도만 떼어주고 나머지 영광은 자기 몫으로 챙기는 일들이 마치 적법한 것처럼 뻐젓이 벌어진다. 소위 성공한 목회자의 모습에서 이런 증상이 보다 심각하게 나타나는 듯하다. 사업을 하시는 분들도 동일하다. 심지어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시는 분들도 의외로 그런 마인드의 족쇄에서 자유롭지 않다. 예수님의 계명을 내가 지켰다는 가시적 원인이 우리의 의식을 장악하면 아무리 입술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도 의식의 저변에선 그 영광을 탈취하는 틀 속에서 연출되는 그런 체면치레 차원의 영광 돌리기일 뿐이다.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면 그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된다. 주님의 약속이다. 순종과 보상, 불응과 형벌이란 구조를 지닌 약속이긴 하지만 주님께서 택하시고 이루시는 선행적인 은혜의 충만 속에서의 조건형 계명이란 사실을 망각하지 말아야 하겠다.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도 감사하고 그 일에 내가 주체가 된 형식을 취하면서 여전히 친히 이루신 것도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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