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16일 월요일

슬픈 동물원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시49:20)

시인은 여기서 지혜와 명철을 말하고자 하는데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비록 최상급 존엄성을 지닌 존재라 할지라도 멸망하는 짐승과 다르지가 않단다. 존귀와 멸망의 분기점을 제공하는 시인의 지혜와 명철은 어떤 것일까가 궁금하다.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하는 자를 언급한다. 그는 타인도 구속하지 못하고 자신을 위해서도 속전을 제공하지 못한단다. 생명을 속량하는 비용의 막대함 때문이다. 영원토록 살되 죽음을 보지 않을 정도의 비용은 얼마일까?

다달이 월세 지불하는 것도 버거운 마당에 영원히 사는 삶을 위하여, 그것도 죽음의 그림자가 얼씬도 못하는 삶의 보증금은 얼마나 막대할까? 인간의 산술로는 아무도 가늠하지 못할 액수겠다. 구속이나 속량은 결코 사람에게 내맡겨진 것이 아니다.

사람은 죽는다. 게다가 재물은 남에게 남긴다. 사람이 임의로 변경하지 못하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속으로는 집도 영원하고 자신의 거처도 대대에 이른다고 여긴단다. 이런 자들에겐 사망이 그들의 목자이고 스올이 그들의 거처란다. 시인의 목소리가 단호하다.

그들이 죽으면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들의 영광도 그들을 따라가지 못한단다. 이러한 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명망하는 짐승과 같다는 게 시인의 논지이다. 죽음을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허탄한 기준을 가지고 썩어 없어지는 목표에 집착하게 된다.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모든 것들은 죽음에 의한 상대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되겠다. 죽음의 저울로 달아본 이후의 가치가 여전 고귀하면 붙들어야 한다. 그러나 죽음으로 종결되는 한시적인 가치에는 그에 부합한 제한적인 의미만 부여해도 족하겠다.

세상의 열광하는 소리에 부추김을 당하지 않는 사람은 드물다. 대부분 호감의 안테나를 그쪽으로 기울이다. 그러다가 어떤 기운이 감지되면 신속한 군침과 더불어 모닥불에 불나방 달려들듯 죽음을 불사하고 그쪽으로 질주한다. 사망이 목자라는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사람의 인간다운 존엄성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을 인정하는 곳에서 시작된다. 죽는다는 것과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한다는 사실 말이다. 이 사실에 냉소의 콧방귀를 분사하는 자는 영원히 살 것처럼 그리고 모든 것을 영원히 소유할 것처럼 바득바득 긁어 모으려고 한다.

짐승을 보려고 동물원을 출입하지 않아도 주변에서 충분히 해결되는 현실이 너무도 안타깝다. 최소한 교회는 동물원이 되지 말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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