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6일 금요일

제임스 브랫의 카이퍼 특강 1

제임스 브랫(James Bratt)은 칼빈 칼리지의 역사학 교수이다. 오늘(2013년 12월 5일 7시) 베이커가 최근에 출판된 그의 책 사인회 겸 특강을 마련해서 참석했다. 아주 유익했다.

1. 예일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며 카이퍼의 시대를 깊이 연구할 수 있었고 미국의 더치 이민사를 다루게 되었다. 미국 종교사의 권위자인 그의 지도교수 시드니 알스트롬(Sydney E. Ahlstrom)은 카이퍼가 대단히 다르고 고유한 인물임을 지적하며 보다 지속적인 연구를 권하였다. 그리고 풀브라이트 연구비를 받아 두 차례 카이퍼를 단독으로 연구할 수 있는 기회도 주어졌다.

2. 미국의 종교적 관점을 보자면 같은 개혁주의 입장을 취하여도 대단히 다양한 부분들의 몇 조각만 가진 종파들이 미국 전역에 흩어져 있었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이 모든 개혁주의 신학의 조각들을 두루 담지하고 있는 인물이 바로 카이퍼란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다. 카이퍼에 대해 다양한 구호들이 그에게 라벨처럼 붙는다. 기독교 학교, 일반은총, 영역주권 등의 다양한 구호들이 있지만 도대체 이 모든 것들이 산출된 근거가 어떤 것인지가 궁금했다. 이것이 바로 카이퍼를 대하는 브렛의 굶은 물음이었다.

3. 카이퍼를 대하는 다양한 반응들이 있다. 한편으론 그를 영웅으로 추앙하고 어떤 사람들은 평균치의 인간적인 대우에도 인색하다. 브렛은 카이퍼를 정당한 인간답게 대우하는 회복을 시도했다.

4. 카이퍼는 대단히 중요한 시대적 물음에 직면해야 했다. 카이퍼 자신의 시대에 카이퍼는 어떻게 정의되고 있었는가? 카이퍼를 둘러싼 맥락을 3가지로 지적하려 한다. 1837년도에 태어났다. 17세기의 화란은 유럽 사회와 경제와 예술의 기수로 여겨질 정도로 대단히 잘나가는 국가였다. 그러나 다른 유럽의 국가들과 특별히 영국이 산업혁명 이후로 부상하여 화란의 내리막길 행보가 끝자락에 이르렀을 무렴에 카이퍼가 태어난 것이다. 카이퍼의 정신에 회복에 대한 열망이 타오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프랑스 혁명도 지났고 프랑스에 의해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었다. 국가적 회복과 예술과 교육과 학문의 회복과 경제의 회복이 극히 갈급했다.

5. 19세기 중반에 화란의 경제가 반등하기 시작했다. 카이퍼는 라이든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1863년에 직업을 찾고자 하였다. 우트레히트 아래의 조그마한 마을에서 목회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마을에도 철도가 뚫고 들어올 정도였다. 화란의 경제는 급속히 발전했다. 철도는 독일의 경제와도 연결하는 가교였다. 지리적인 차원에서 유럽은 지구촌 사회였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었다. 강제적인 교육을 요구하게 되었다. 모든 아이들은 적정한 연령에 이르면 학교에서 교육을 받아야만 했다. 국가에게 좋은 일이었고 모든 이들에게 좋은 것이었다.

6. 어떤 학교를 세울 것인가? 기독교 정치가인 카이퍼의 첫번째 정치적 관심사는 공공교육 정책이다. 모든 사람들을 위한 하나의 공적인 학교를 세워 강제적인 교육을 행하는 것을 생각했다. 사람들은 교과과정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물었다. 읽고 쓰고 비평하는 것이 좋다. 건강한 시민성과 종교와 도덕적 원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나 이신론이 대안들 중에 있었으나 카이퍼는 충분히 좋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른 특정한 확신을 가진 가정들은 불공정을 감수해야 했기 때문이다. 보수적인 사람들은 학교가 기독교 학교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카이퍼는 반대했다. 유대인에 대해서는 공정하지 않은 처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개신교 학교는 로마 카톨릭에 공정하지 않았다.

7. 이때 카이퍼가 확립하게 된 원리는 평등한 공의(equal justice)였다. 당시 영국과 독일과 프랑스의 학교는 기독교 학교였다. 카이퍼가 보기에 그것은 공정하지 않은 것이었다. 어떤 특정한 신념이 강요되는 학교의 정체성은 모든 사람에게 공정한 원리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기독교적 권리의 방어는 언제나 모든 사람에게 공정함과 병행해야 한다고 여겼다. 이러한 생각이 카이퍼의 고유한 생각은 아니지만 그의 표지였다.

8. 모든 국가가 직면했던 공통적인 물음들이 있었다. 누가 학교를 통제할 것인가? 사고방식 형성은 누구의 몫인가? 누구의 생각이 원리로서 가르쳐 져야 하는가? 이런 국제적인 질문들과 카이퍼는 씨름했다. 공공교육, 이것은 모든 산업화된 국가가 직면해야 하는 초미의 주제(the issue)였다. 1870년 미국도 공공학교 역할에 대한 논의에 예외가 아니었다. 어떤 이의 교과과정을 선택할 것인가? 개신교는 선택권을 로마 카톨릭와 유니테리안에 양보하려 하지 않았다. 1870년대에는 독일이 비스마르트에 의해 통일이 되었고 결혼과 학교의 세속화가 일어났다. 모든 나라가 이렇게 공공학교 문제를 해소시킬 방안 모색에 여념이 없었다.

9. 카이퍼의 관심사는 정당과 정치로 기울었다. 1901-5년에는 네델란드 수상이 되었다. 1905년에 재선에 도전했다. 그러나 당시의 어려운 문제를 잘 해소하지 못하였다. 대체로 카이퍼는 곤경을 잘 극복하지 못하였다. 루즈벨트가 미국에서 1905년에 대통령이 되었다. 러시아는 피의 일요일로 불리는 1905년 민중운동 불길에 휩싸였다. 19세기의 첫번째 사반세기 기간동안 세계의 모든 나라들은 정치적인 격동을 맞이했다. 영국과 미국과 일본에도 그러했다. 자유주의 물결이 격렬했다.

10. 산업화의 가속화에 묻힌 희생들도 만만치 않았다. 파업들이 난무했다. 카네기의 경우, 노동자를 잠재우기 위해 사병들도 가지고 있었다. 카이퍼는 정부의 서툰 정책이 끼치는 부작용을 염려했다. 카이퍼는 거대한 산업 자본주의 팬이었다. 그러나 칼빈주의자인 그가 보기에 정치신학 측면에서 1%가 다스리고 99%가 그들에 의해 통제되는 것은 올바르지 않은 것이었다. 정부에게 권한을 주어 노동자를 임의로 통제하게 만들지 않고 노동자에게 권한을 주어 자신들의 일을 스스로 협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선호했다. 즉 카이퍼가 선호했던 것은 작은정부 진보주의(small government progressivism)다. 이것이 필히 정치적 자유주의 사상과 결부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든다면, 사람들은 큰 정부가 아니라 지역 공동체에 권한을 부여하게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카이퍼의 수상직 끝자락에 공공의료 문제로 돌입하게 되었다. 자신이 이 부분을 저술할 무렵에 오바마는 공공의료 문제로 대통령 리더십을 상실하고 있었다. 기괴한 일치였다.

11. 카이퍼는 Universal health insurance for everybody with public option을 생각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보편적인 건강보험 가지는 건 사회적인 강요였고 사적인 보험과는 협상해야 했다. 이는 공공교육 경우에도 동일했다. 하지만 카이퍼가 유토피아 사상에 경도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보수적인 사람이다. 그는 모든 것이 정부의 주도권 아래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칼빈주의자다. 어떤 인물이나 집단이나 산업이 막대한 권력을 축적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런 면에서 그는 제임스 메디슨(James Madison) 대통령과 생각의 결이 동일했다. 카이퍼는 견제와 균형을 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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