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12일 목요일

길고 넓은 안목이 중요하다

모든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선 때에도 진실로 허사일 뿐입니다 (시39:5)

이러한 논지의 근거로서 시인은 인생의 종말과 연한의 단기성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인생이 하나님의 눈에는 그림자일 뿐입니다. 그림자의 존재는 태양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비추임을 받지 못하면 인생은 살았어도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밖에서는 인간이 존엄성의 극치에 이르른 때에라도 존재의 근수는 제로를 가리킬 뿐이라고 시인은 말합니다. 번영은 사람들을 취하게 만들고 실존을 망각하게 만들고 허망한 무아지경 상태로 내몬다는 칼빈의 까칠한 진술은 우리의 오늘을 가리키는 듯합니다.

냉온수나 냉난방 시설도 부실했고 거리는 짐승들이 밀어낸 배설물의 악취로 진동했고 전화기도 비행기도 인터넷도 없었던 종교개혁 시대의 사람들이 인지했던 번영의 빈약한 개념과는 달리 지금의 번영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도록 훨씬 강한 중독성과 마취성을 보입니다.

인간의 이러한 보다 든든한 상태로의 행보는 중단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누렸던 번영과는 비교할 수 없도록 유려한 문명의 때가 또 도래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의 판단은 변경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때에라도 허사라는 것 말입니다.

인생의 길이는 한 뼘입니다. 손톱 길이의 연장을 위해 문명과 감격과 도덕과 과학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시간과 영원의 현저한 격차를 식별하는 안목의 절박성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런 안목에서 하나님 안에서만 소망이 있다는 판단이 나옵니다. 

시인의 진단은 인생을 대상으로 삼았지만 바울은 이 세상을, 이사야는 온 우주가 하나님 앞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를 바가 없으며 헛되이 지나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시야는 좁고 짧습니다. 그런 안목에는 주님께만 소망이 있다는 말이 관념의 유희일 뿐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벌여지는 삶의 소소한 일상을 가볍게 보자는 게 아닙니다. 그런 평범함 속에도 온 우주와 역사 전체에 대한 의식이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대상에 대한 무시나 폄하가 아니라 그것을 대하는 우리의 올바른 태도를 문제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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