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13일 금요일

위로도 거절했다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했다 (시77:2)

아픔이 야밤의 비처럼 중단을 모르고 쏟아지는 환란의 때였다고 한다. 어떤 위로로도 해결될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서 하나님을 생각했다. 그런데도 불안이 엄습했고 불평이 쏟아졌고 영혼은 상하였다. 문제의 근원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결국 하나님 때문에 시인은 평온한 이불 속으로 들어갈 수 없었고, 괴로워서 입술은 언어를 밀어낼 기력도 없었단다. 예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어두운 고뇌의 밤에 부르던 노래까지 기억으로 길러냈다. 그건 노래가 아니라 마음이 쏟아내는 절규였다.

주께서 영원히 버리신 건 아닐까? 은혜의 때가 지나가고 영영히 돌아오지 않는 것일까? 혹시 은혜 베푸시는 것을 잊으셨나? 혹시 주의 인자도 바닦이 나고 견고하던 약속도 폐하여진 것은 아닐까? 진노의 게이지가 상승하여 긍휼마저 잊으신 것일까?

이런 근원적인 물음들이 전두엽 주변에 빼곡히 운집했다. 그런데 시인은 "쉘라"라는 추임새 한 어절을 툭 던지고는 돌연 작금의 사태를 자신의 허약으로 돌리고 주체하지 못할 신음이 쏟아지는 고난의 때를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로 규정한다.

사람의 머리로는 납득할 수 없었던 출애굽의 기적, 당신의 백성을 속량하신 사건에 기억의 손을 뻗겠단다. 그때에는 물이 하나님을 목격하고 그 깊음이 떨었었다. 바다에 길이 있었고 마르고 반듯한 길이 심연에 있었지만 그런 주님의 움직임을 감지하지 못했단다.

누구도 변경하지 못할 약속도 폐하여진 듯하고, 하나님의 은혜도 항구적인 것이 아니라 어느 시점의 한시적인 현상으로 여겨지고, 그 무궁하던 인자와 긍휼도 바닥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차갑고 엄중한 진노의 느낌만이 의식의 목덜미를 거머쥐던 때였다.

비록 드물지만 누구나 그런 영혼의 어두운 밤을 지나간다. 은혜와 긍휼과 동행과 인자와 구속의 하나님은 보이지를 않고 위로도 거절하고 싶은 웅덩이에 내던져진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발자취는 도무지 발견되지 않는 때 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난의 바다에 길이 감추어져 있고 그 심연도 그 길을 방해하지 못한다는 사실, 그 알려지지 않은 하나님의 발자취를 믿음으로 보고 신뢰해야 한다. 어떠한 때에라도 길을 내시는 분은 주님이며 주님 자신이 또한 영원한 길이시다.

주님은 저주의 십자가에 죽음으로 길을 마련하신 분이시다. 곧장 어두움이 뒤덮어도 결코 소멸되지 않는 길이시다. 주님 당시에도 절망의 바다가 뒤덮고 있었지만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가장 캄캄한 십자가의 심연에서 주님은 길을 예비하고 계셨다.

출애굽의 하나님은 변경되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십자가의 주님은 어떠한 험산준령 속에서도 여전히 길을 내시고 길이 되시고 길로 이끄시는 분이시다. 세상의 바다를 표류하는 우리에게 지금도 우리에게 육안으로 그 자취가 잘 발견되지 않는 길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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