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27일 금요일

절대적인 관계성

쇠렌의 [두려움과 떨림](Fear and Trembling)에 의하면, 진정한 믿음은 "절대적인 존재와의 절대적인 관계"를 요구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아브라함 이야기다. 그는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 이삭을 희생물로 삼아야만 했다. 부모가 자녀를 죽여야만 한다는 조항은 세상 어디에도 없었던 법령이다.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 믿음의 조상은 인륜에 반하는 명령을 행동으로 옮겨야만 했다. 절대적인 존재와의 절대적인 관계성이 없었다면 그런 믿음의 행위는 산출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쇠렌의 판단이다. 

마리아와 요셉의 경우도 동일하다. 남자를 모르는 처녀가 아이를 갖는다는, 보편적 자연법에 정면으로 충돌되는 일이 그녀에게 일어났다. 창조의 질서만이 아니라 죽음의 돌세례가 마땅한 율법의 요구와도 모순되는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되는 일이 하나님 자신에 의해 벌어졌다. 놀랍게도 마리아는 당황하고 놀랐으며 요셉도 놀라고 아팠으나 찬양하며 순종했다. 이런 순종의 단절적인 판단의 원인을 규명하는 것은 간단하지 않다. 절대적인 관계성 없이는 발생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게 쇠렌의 설명이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성은 어떠한가? 잔잔한 미풍에도 심하게 요동치는 경박한 관계성은 아닌지를 돌아보게 된다. 관계성은 신앙의 한 전제이다. 주님과의 관계성은 믿음으로 사는 삶의 전제이다. 전제가 부실하면 삶도 갈대처럼 이리저리 흔들린다. 화목한 관계의 중보자가 되시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 되시기에 어떠한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게 정상이다. 그러나 실상은 관계성이 협박의 무슨 수단으로 동원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뭘 해주지 않으면 관계를 끊겠다는 식이다. 

믿음의 선배들이 보여준 주님과의 견고한 관계성에 도전을 받는다. 힘들고 절망적인 때일수록 믿음이 더 강하여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할배와 요셉/마리아의 순종이 의식을 맴돈다. 예수님 자신도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라며 죄가 없어 전적으로 순결하신 분이면서 죄와 저주와 억울함과 죽음의 잔을 담담히 기울이셨다. 해석할 독법이 도무지 존재하지 않는 일들이다. 아~~~ 사활을 건 믿음의 삶을 떠받치는 진정한 관계라는 것은 과연 이런 것인가! 주님과의 절대적 관계성을 하루종일 깊이 상고하고 싶어지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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