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12일 월요일

합당한 영광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리라

이 대목에서 사유의 신경은 뻗뻗하게 마비된다. 무한하신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의 분량이 가늠되지 않아서다. 상상의 최대치를 발휘한다 할지라도 그분에게 어울리는 영광의 합당한 분량에는 도달할 자신이 없어서다. 그 지점을 의식의 촉수로 혹 더듬었다 할지라도 그런 분량으로 영화롭게 할 실천 가능성은 더더욱 없어서다. 다만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 하며 바다와 거기 충만한 것은 외치며 즐거워 하라는 시인의 결론이 그나마 위안이다.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합당하지 않다면 산출될 수 없는 내용이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코람데오(before God) 문제와 직결된 사안이라 하겠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에 두셨다'는 모세의 정직한 인식의 부스러기 한 조각만 있어도 하나님 앞에서 고개를 뻣뻣하게 세울 수 있는 피조물이 없다는 사실에 고개를 수그리게 된다.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 수 있으며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실 것인가' 하였던 엘리후의 하나님 지식까지 운운하지 않더라도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라는 명령은 실제로 우리에게 준행될 것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그래서 그 명령이 어울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이라는 자리로 우리의 눈길을 돌리라는 시인의 의도가 읽어진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예수님에 의해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이 돌려지는 그 현장에 머물면서 기뻐하고 즐거워 하라는 들키도록 감추어진 의도 말이다.

뭐 좀 했다고 목에 힘이 들어가지 못할 이유는 명백하다. 하나님께 헌신하고 그분의 수족이 되어 섬기는 건 참으로 아름답고 향기로운 일 맞다. 그러나 헌금통의 근수를 조금 늘이고 전도와 봉사의 땀으로 현장을 조금 적셨다는 것이 교회를 쥐락펴락 할 근거라도 되는 양 스스로 부여한 특권을 방자히 행사하는 종교적 졸부들이 되어서는 안되겠다. 조금 더 알고 설교로 은혜와 감동을 끼쳤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사람들을 무례하게 대하고 영적 우월감에 도취되는 졸부 목회자가 되어서는 더더욱 안되겠다.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참여한 한 지체로서 더불어 기뻐하고 즐거워 하는 게 우리의 본분이라 생각한다. 이런 기본기가 상식 차원에서 잘 다져진 목회자와 성도가 아름답고 향기로운 교회를 이룬다. 이런 교회가 두터운 층을 이루는 민족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크다는 사실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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