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25일 일요일

보다 확실한 예언

우리에겐 보다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벧후1:19)

영원토록 변하지 않아서 지금 말하는 그것이 세상의 마지막 순간에도 여전히 옳은 것이 진정한 예언이다. 그래서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세월의 발톱이 아무리 할퀴고 치명적인 풍상을 유발해도 영원토록 변하지 않는 성경보다 더 확실한 예언은 없다. 진리의 빛을 두터운 오류로 덮어 보다 어두워진 때일수록 성경은 더욱 요긴하다. 성경을 읽고 탐구하는 것은 가장 깊은 예언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당연히 사사로이 풀어서는 아니된다. 그래서 성경의 긴 해석사는 진리의 정통성(orthodoxy)와 보편성(catholicity)을 해석의 두 기둥으로 삼았었다. 물론 권위의 순서에 있어서는 정통성이 보편성에 선행한다.

정통성은 성경이 성경 자체의 주석(scriptura sui ipsius commentarius)이란 사실에 근거하여 성경과 더불어 (cum scriptura) 성경 안에서 (in scriptura) 성경으로 말미암아 (per scripturam) 해석에 왜곡이나 오류나 충돌이나 모순이 있지는 않은지를 규명하는 잣대를 지칭한다. 즉 성경의 올바른 해석은 성경이 말하지 않은 침묵의 경계선은 함부로 범하지 않으면서 (sola scriptura), 성경이 언급한 말씀은 토시 하나라도 묵언이나 망각으로 그냥 지나치지 않아야 하는 (tota scriptura) 원리에 충실해야 한다.

보편성은 성경이 기록되던 선지자들 및 사도들의 시대부터 사도들의 제자들과, 그들의 제자들인 교부들과, 그들을 바르게 읽은 경건한 중세 학자들과, 그들의 문헌들을 섭취하며 교회의 부패 무더기를 제거하고 정통을 회복시킨 종교개혁 인물들과, 그들을 건강하게 계승하되 조직적 교육적 제도적 고백적 체계적 규모를 현저하게 고양시킨 정통주의 인물들과, 그들의 유산을 지금도 보존하고 고백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동일하게 알아온 진리의 도도하고 편만한 흐름을 일컫는다.

진리의 정통성과 보편성이 의미하는 바는, 성경 한 구절을 풀기 위해서는 그 구절 주변에 운집한 근거리 맥락도 간과되지 말아야 하겠지만 성경 전체와 그 성경의 해석사라 할 인류의 시간 전체가 거대한 문맥으로 존중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거다. 나아가 그 문맥보다 크신 하나님이 성경의 저자라는 사실에서 하나님 자신을 성경 푸는 최종적인 배경의 정수로서 존중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겸손하지 않을 수 없고 입을 함부로 열어서는 안되는 이유도 여기서 발견된다.

확실하지 않고 지극히 주관적인 '예언'으로 성경의 보다 확실한 예언을 대체하는 무리들이 있다. 성경의 규범적 계시를 짓밟아 교회의 터를 허물고 스스로를 사도와 선지자로 지칭하며 다른 사도와 선지자를 추종자로 세우는 경솔하고 망녕된 행실까지 경건으로 여기는 무리들의 광란에 너무 놀라거나 과도히 반응할 필요 없다. 어제오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교회의 제도적 권위를 남발하는 자들의 오만과 방자를 비판하고 견제하기 위해 제도권 밖에서 또 다른 극단의 무절제한 길을 걷는 동일하게 오만한 반작용의 주기적인 출연은 역사 속에서 늘 목격되는 현상이다.

"교회가 이단으로 장악되는 상황에서 성도의 유일한 피난처요 참된 기독교 진리의 유일한 시금석은 성경 뿐이라"는 황금의 입술 크리소스톰이 마지막 때의 혼돈을 갈파하고 내뱉은 경고성 탄식이 떠오른다. '마지막 때'라는 용어로 긴박감을 조성하여 차분하고 객관적인 판단력을 제거한 후 은밀하고 추한 이윤을 취하고자 하는 무리들의 광기를 잠재우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가 진리의 샘인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ad scripturam)이다. 이런 필요성 제고의 수단으로 악한 날에 악한 자들도 적당히 지으신 주님의 섭리가 놀라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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