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3일 토요일

주체를 묻는다

가슴 속의 지혜는 누가 준 것이냐 마음 속의 총명은 누가 준 것이냐

히포의 어거스틴 주교가 인간의 공로를 고려하는 예정론과 순종 개념을 펼치다가 카르타고 순교자 키푸리안 주교의 단문을 읽고 신학적 거듭남을 경험했다. 문제의 단문은 이렇다. "어떠한 것도 우리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것에서도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면, 가장 항구적인 순종에 대해서도 자랑할 수 없음은 너무도 명백하다 (si in nullo gloriandum est, quando nostrum nihil est, profecto nec de obedientia perseverantissima gloriandum est)."

이런 어거스틴 회심 이야기는 이후로 교회사의 등줄기를 타고 괜찮은 신학자의 문헌에 출연하여 마르고 닳도록 회자된다. 교리의 짧지 않은 역사가 이 대목의 중요성을 인증한 셈이다. 사안의 중요성은 반복의 지루함을 압도하는 법이니까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내가 믿었고 내가 믿음으로 순종한 것인데도 믿음과 순종의 주체에 일인칭 사용이 거절될 수밖에 없다면 사람의 일반적인 상식과 합리성은 그 지점에서 필름이 끊어진다. 맹목적인 교리의 횡포라는 딱지 붙이기가 이어지는 수순이다.

하지만 상천지하 질서들 중 최고의 궁극적인 질서라 할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아는 지혜와 거기에 순응하는 총명의 근원적 출처를 우리의 가슴과 마음 너머로 소급하여 하나님께 둔다는 것은 교리 메니아의 어설픈 발상이나 장난끼의 소산이 아니다. 땅에서 으뜸가는 의인 욥조차 헤어나올 수 없었던 이치 가리는 교만과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무지의 늪에서 나오도록 던져진 동아줄과 같은 주님의 질문에 믿음의 선배들이 한결 같이 내뱉은 답이었다.

우리는 좋은 것이 내게서 비롯되지 않았다 하고 생색의 기회도 박탈되는 사안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필요성에 대한 느낌도 부러 차단하는 경향이 있다. 심하면 로마서 초두에 등장하여 로마서 저작의 동기가 되었던 인물들, 자신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고 자신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드러내면 심판이 아니라 영광의 보좌에 동석할 것이라며 선보다 악을 행하자는 인물들의 삐딱한 논리에 더 끌리는 경향 말이다.

각 시대마다 출몰하는 유행성 화두들이 다양하나 그 모든 문제의 온상이라 할 인간의 본성을 건드리는 '마음 속의 지혜와 총명은 누가 주었느냐?' 문제는 결코 가볍게 다루어질 수 없는 화두 중의 화두이다. 사태의 본질을 치고 들어가면 결국 직면해야 할 근원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내겐 이 문제를 반복하는 분들을 시대에 뒤떨어진 신학의 구닥다리 퇴물로 냉소하는 그 사람이 오히려 가볍게 느껴진다.

사람의 실 한자락의 자랑조차 물고 늘어지는 목회자가 귀찮고 불편할 수 있겠으나 그를 욥의 출중한 의로움도 상대적인 것으로 만든 화두의 삽바를 붙들고 씨름하는 고귀한 분으로 여김이 마땅하다. 그 사안에 교회조차 무신경한 현실이 더 문제인 거다. 교회에서 너무도 황당하고 굵직한 문제가 하도 많이 터지니까 '인간의 본성' 운운하는 신학이 관념의 사치처럼 비췬다는 거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욥처럼 원숙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지극히 현실적인 생존의 벼랑 끝에서도 문제의 실마리를 주체에 대한 물음으로 풀었다는 사실을 반추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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