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18일 일요일

쇠하여야 하리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요3:30)

여인의 태에서 난 자 중에 가장 큰 자의 입술에서 나온 말인데 '쇠하여야 한다'는 내용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 오히려 흥하고 번창하는 것이 큰 자의 이상적인 모습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세례 요한이 살아낸 생애를 한 문장으로 고스란히 담아낸 말입니다. 자신의 삶을 다르게 보이려는 수사학적 포장이 아닙니다. 삶의 방향과 내용을 분명히 간파하고 결단하고 실제로 살아간 삶이 그의 고백에 너무나도 정교하게 포개지고 있습니다. 

교계에서 메시야와 엘리야로 여김을 받을 정도의 출중한 인물로 거론되는 세례요한 입술에서 자신은 '쇠하여야 한다'는 말이 비록 율법과 선지자 전체가 그리스도 예수를 가리키는 그림자에 불과함을 보이고 주의 길을 예비하는 구속사적 함의도 있지만, 스스로가 의도하지 않은 정당한 높아짐도 단호한 옆차기로 제거하고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한 말이 자신은 메시야도 선지자도 아니라는 요한 개인의 고백은 주님을 따르는 자들의 겸손한 삶과 태도의 범례로서 역사의 등경 위에 둠이 마땅해 보입니다. 

예수님께 세례를 주었기에 예수님의 권위 위로 가뿐히 뛰어오를 수도 있었고, 당시 집권자인 헤롯이 그를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그를 보호하려 할 정도로 출세와 성공의 대로가 열려 있었는데, 오히려 그는 예수님의 신들메도 풀지 못한다며 주님만을 높이고자 했고 헤롯의 도덕적 불의를 찔러 뻔한 투옥의 길을 마다하지 않았던 분입니다. 결국 참수형을 당하는 죽음으로 생을 마감하여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그를 메시야로 여기고 따를 혹시 모를 우둔한 추종 가능성도 원천봉쇄 할 정도로 철저히 쇠하는 인생을 죽는 순간까지 고집했던 분입니다.

세례요한 이야기를 끄집어 낸 것은 그냥 죽고 망하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이 존귀케 되도록 쇠하자는 것입니다. 그런 방향을 따라 '죽하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이는 조금만 능력이 나타나면 그걸 방편으로 뭔가를 건지려고 하고, 어떻게든 유력한 자들의 손에 명함을 내밀려고 발버둥을 치는 삶과는 결이 전혀 다른 길입니다. 저로서는 엄두도 낼 수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는 생의 이정표는 끝까지 붙들 것입니다. 그것이 목회자와 성도의 길이요 삶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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