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4일 일요일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한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

건설적인 비판이 우리의 생각과 행동에 적당한 분량의 긴장과 성찰의 계기를 마련해 준다는 특급 중요성은 비록 뾰족한 통증을 수반하긴 하지만 친구나 동료관계 속에서 필히 공유되지 않으면 안되는 사안이다. 주변에 면책의 쓴 목소리가 들리지 않고 달콤한 찬동의 기쁨조로 둘러싸인 사람의 영혼은 서서히 끓는 가마솥의 개구리 신세와 다르지 않다. 안락한 환경을 즐기면서 죽어가는 신세 말이다. 자신의 말과 행동에 반론의 그림자만 보여도 뒷담화의 도마에 곧장 올려 교제의 단절에 준하는 조치를 취하는 건 그렇게 하는 당사자의 상태가 심히 중하다는 반증이다.

근거 없는 비판의 난무도 문제지만 건설적인 비판의 멱살을 거머쥐는 것은 갑절의 위험을 초래한다. 적을 아군으로 여기고 유입하는 것보다 아군을 적으로 간주하고 공격하는 것이 더 나쁘다는 건 인체의 면역뿐만 아니라 국가간의 전쟁에 있어서도 맞는 말이라고 한다. 몰락한 왕가의 잔류로서 이스라엘 통일왕국 초대왕을 신복들과 백성들 앞에서 공적으로 능멸한 시무이의 입술에서 육두문자 수준의 망언을 듣고서도 '주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두라'고 명한 다윗의 저 드넓은 도량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견제가 없는 권력과 비판이 없는 조직은 필히 부패하고 망한다. 지혜자는 무리 중에서 스스로 나뉘는 자를 자기의 소육을 따르면서 온갖 참지혜를 배척하는 자라고 했다. 견제와 비판이 없으면 아무리 중다한 무리 가운데에 있더라도 스스로 나누이는 지혜의 배척자와 같다. 아무런 저항도 없이 개개인의 자발적인 동의와 협조를 얻으면서 공동체를 허무는 이리도 유용하고 효과적인 방법에 그 영악한 사단이 군침을 흘리는 건 너무도 당연하다. 사단이 은밀하게 그러나 왕성하게 활용하는 이런 류의 유아독존 전략은 비판과 반론에 귀가 닫힌 자에게는 백발백중 성공한다. 건설적인 비판의 부재와 그런 비판의 배척은 사단에게 동일하게 유용하다.

친구의 얼굴을 윤택하게 만드는 건 귀를 달콤하게 하는 칭찬이 아니라 날카로운 그러나 건설적인 비판이다. '두 신체에 깃든 하나의 영혼'이라 할 친구를 지혜자는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관계로 규정한다. 깎이는 아픔의 결과로 서로의 얼굴을 빛나게 만드는 관계라는 얘기다. 그런 친구가 주변에 없다면, 그건 비상이다. 도전과 비판과 견제를 교환할 친구의 부재는 온갖 참지혜를 배척하고 멸시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그래서 비상이다. 나에게 비판의 적당한 견제구를 날리는 친구가 얼마나 소중한지 모른다. 어떤 댓가를 지불한다 할지라도 그런 친구를 얻고 그런 친구가 되어주는 문화의 건강한 정착이 교회에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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