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14일 수요일

분별과 적용

무엇이든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분별의 날이 예리하다. 말과 행위는 필연적인 관계가 아니어서 수려한 언어를 내뱉는 미끄러운 입술 소유자의 행실이 개차반일 경우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언어는 부드럽고 유순한데 빼앗고 탈취하는 못된 행실의 가리개로 동원된 들러리일 수가 있다는 말이다. 말보다 행위의 신뢰도가 높은 법이다. 말은 몸과 마음이 따르지 않아도 용이하게 활동하나 행위는 최소한 몸의 협조는 받아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실존이 본질에 앞서고 행위가 이론을 산출한다, 그런 문맥에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행위의 보다 높은 신뢰성을 영혼의 부정직 가리는 수단으로 삼을 수도 있다는 지점에 이르면 뿌연 혼돈이 시작된다. 실제로 눈으로 똑똑히 목격하고 확신한 것이 우리를 속이는 경우가 많다. 사단이 주로 활용하는 할로윈 분장을 훨 능가하는 '광명의 천사' 가장은 괜찮은 외모만이 아니라 행위에 있어서도 정체를 알아볼 수 없도록 그 꼼꼼함이 가히 천사의 수준이다. 육안에 근거한 판단이 걸려들 정도의 함정 마련하는 건 식은 죽 먹기라는 얘기다. 이렇게 따져 들어가면 누굴 믿어야 하나? 신뢰의 유일하고 궁극적인 대상은 하나님 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경계해야 한다는 과도한 적용의 길을 걸으라는 게 아니다. 사랑과 존중이 마르고 불신과 의심이 왕성한 사회보다 사단이 활동하기 용이한 무대가 없다. 아무리 사안이 긴박해도 의심이 열쇠일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다. 하여 분별의 날을 최대한 예리하고 정교하게 갈더라도 그것을 적용할 때에는 둥글고 부드러운 '사랑의 방식을 따라'야 한다. 예수님의 처방처럼, 올바른 고백은 존중하되 행위는 본받지 않는 선에 머무는 것이 가장 적당하다. 이는 혹 가라지가 흉한 고개를 내밀고 그 가라지의 배후에 사단이 있음을 안다 할지라도 알곡의 안전을 위해 때가 이르도록 건드리지 않는 태도와도 상통한다.

정체를 몰라서가 아니라 그것을 알고도 악을 선으로 이기는 보다 높은 유익과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예리한 분별력이 필요하고 그것이 문제를 푸는 열쇠이기 위해 원수라도 품을 사랑이 필요하다. '때려잡자 공산당' 식으로는 가장의 창의성만 부추길 뿐이다. 마르지 않는 유형의 가장들이 얼마든지 잠재되어 있어서다. 귀신 하나가 쫓겨나자 그보다 더한 독종이 일곱이나 추가되는 악화는 어제오늘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고 분별력이 연약한 분들의 무방비를 방임하는 것은 무책임한 처사다. 하여 필요에 따라 경계의 나팔은 적당히 불어야 한다.

아~~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해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을 자신의 명예와 부와 자기만족 수단으로 취하려는 악한 무리들의 역겹고 고약한 시도들은 언제나 잠잠해질 것인가! 하늘과 땅과 그 사이에 속한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것이거늘 어찌 소유주의 권위와 영광에 흠집의 칼을 들이댄단 말인가! 마른 막대기와 벌레만도 못한 밑바닥 가치에 허덕이던 인간을 살려내고 치유하고 회복시켜 하나님의 자녀 신분까지 높아진 인간의 비교될 수 없는 높은 가치를 허물려는 모든 시도들에 저항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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