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15일 목요일

성화를 말한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찌니

'성령으로 사는 것'은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맺어가는 삶이라는 멘트 이후에 등장하는 구절이다. 우리가 만일 성령으로 사는 사람이라 한다면 성령을 따라 행하잔다. 곧장,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며 헛된 영광을 구하지 말자는 구체적인 행위의 내용을 언급하는 바울의 설명이 이어진다. 이게 '성화'의 개념이다. 이런 삶과 행동이 없으면 성령으로 사는 사람도 아니고 성령으로 행하는 사람도 아니다.

바울이 말한 성령의 삶과 행위는 무슨 음성을 들었고 환상을 보았고 질병을 고쳤다는 것과는 전혀 무관하다. 그런 걸로 자신의 신령함을 입증하고 타인의 존경과 추종을 구걸하는 것은 바울의 취지를 왜곡하고 역류하는 삼류 사기행각 항목으로 분류된다. 성령으로 살지도 행하지도 않으면서 성령 하나님의 명의를 활용하여 자신의 권위와 이익을 은밀하게 관리하는 못된 삯군들이 교회 강단을 희롱한다.

게다가 교회의 덩치가 크면 방귀 꽤나 끼는 학자들도 줄서서 짭짤한 카리스마 부산물을 챙기려고 학문적 미사려구 생산에 열을 올린다. 이에 성도들은 카리스마 뿜어내는 담임 목회자의 포효와 주변에 운집한 먹물들이 타이밍을 조절하며 뿌리는 지성적 추임새에 찬동의 어깨를 들석인다. 이따금씩 '이건 아닌데'란 양심의 고발과 거리낌이 고개를 내밀어도 '대세'를 꺾기에는 용기도 빈약하고 역량도 부족하다.

하나님과 무관하게 온유하고 평화롭고 자비롭고 진실하고 유쾌하고 인내하는 일이 가능함을, 혹은 그것도 연출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그런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성령으로 살고 행하는 구체적인 내용의 객관적 가치와 중요성을 무시해도 된다는 이유나 명분을 제공하진 않는다. 열매가 있고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는 건 기본이다. 그게 연출인지, 하나님이 빠진 경건의 모양인지 식별하는 것은 그 이후의 문제다.

건실하고 좋은 교회들이 많다. 그러나 교회나 개인이나 바울이 명료하게 언급한 성령의 삶과 행실이란 기본기에 충실한지 늘 점검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들이 땅에서 살아가는 삶의 기본기가 부실하면 우리가 말하는 진리의 해석을 부실하게 만든다. 하루의 삶이 타인의 눈에는 우리가 증거하는 복음의 해석이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행동해야 하는 이유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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