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14일 수요일

사생활과 공생활

마음의 고통은 자기가 알고 마음의 즐거움도 타인이 참여하지 못한다.

우리의 마음을 우리보다 더 잘 아시는 주님과만 공유하는 영역이 있다. 타인이 출입할 수 없는 진정한 의미의 사생활 영역이다.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고 격려하고 더불어 기뻐해도 서로의 속을 다 알지는 못한다. 그러니 사람의 위로는 한계가 있고 타인의 형통을 내 일처럼 기뻐하는 것도 야무진 기대일 뿐이다. 당연히 주변에서 알아주지 않는다고 서운해 할 필요 없다. 그렇다고 고립의 운명에 무거운 한숨을 뿜으라는 얘기는 아니다.

인간의 마음은 본래 고난의 때에 유일한 안식처가 주님이고 즐거움이 있어도 '그리스도 안에서만 자랑'할 수밖에 없도록 지어졌다. 이런 창조의 원리에서 고립과 고독의 문제가 풀어진다. 고통이든 기쁨이든 진정한 마음의 소통과 공감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교회가 진정한 공동체다.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의 마음을 주님께서 아시는 분량으로 공감하는 것보다 더 깊은 교류가 다른 곳에서는 없어서다.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주께서 위탁하신 이사야의 목소리다. 함께 그리스도 안에 거하라는 말의 다른 표현처럼 들린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 타인의 고통과 즐거움이 마음으로 소통된다. 그런 고통과 즐거움이 서로의 마음으로 흐르면 그게 위로와 사랑의 견고한 띠가 되는 거다. 그게 교회의 모습이다. 그리스도 안에 더불어 거하면서 희로애락 전영역을 그런 방식으로 공감하고 소통하는 거 말이다.

고통과 즐거움의 은밀한 내용이 확보되면 교묘하게 타인을 정복하고 조종하려 드는 공동체 파괴자의 고약한 근성이 교회마다 불쾌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현실이다. 이는 서로를 적당히 아는 것도 고립과 고독의 모양을 취하기는 했으나 우리를 보호하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로 봄이 타당한 이유다. 적당한 분량의 소통과 공감이 우리를 보호한다. 그래서 적당히 알고 적당히 모르는 게 감사하다.

너무 깊이 알려고 하는 사람의 지나친 접근을 경계함이 오히려 지혜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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