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16일 화요일

고백적 통일성 안에서의 신학적 다양성

Theological Diversity in Confessional Unity

멀러 교수님이 즐겨 쓰시는 표현이다. 진리의 고백적 통일성 안에 신학적 다양성의 공존이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의 특징이란 이야기다. 물론 이것은 다른 모든 시대의 신학에도 해당되는 표현이다. 비록 고백적 울타리의 기준은 디테일의 정도에 따라 달라질 것이지만 말이다. 일전에 멀러 교수님께 개혁교회 고백의 울타리는 어떤 것이냐고 여쭈었다. 주저하지 않으시고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라고 답하셨다. 반가웠다. 내 개인적인 입장과도 같아서다.

답변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멀러 교수님이 루터교회 안에서 신앙의 뼈가 굳으셨고 장로교회 교단에서 안수를 받으시고 목회까지 하셨지만 지금은 미주 개혁교회 교단(CRC)에 몸답고 계시기 때문이다. 당연히 벨직 고백서와 도르트 신조와 하이델 교리문답 중에서 택일하지 않으실까 짐작하고 있었는데, 그 짐작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웨민 고백서를 지목하신 이유가 궁금했다. 이에 교수님은 개혁교회 고백의 가장 견고하고 규모 있는 체계라는 설명을 붙이셨다. 박사과정 진학결정 직전의 일이라 더더욱 반가웠다.

어떤 중량급 교수님의 집에 초대를 받아 교회의 일치에 대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나누었다. 역시 일치의 기준점을 어디에 잡고 계신지가 궁금했다. 그분은 사도신경 고백하면 일치의 가능성이 있다고 말씀했다. 하나님의 백성이 우주적 교회라면 교회의 일치는 하나님의 백성이면 된다는 이야기고 교단이나 교리의 차이가 하나님의 백성된 신분을 폐하는 게 아니라면 일치의 기준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그 백성됨의 가시적 확인은 사도신경 고백에 있다는 논리셨다. 고민이 깊어졌다.

고백적 울타리의 기준도 다양하고 각 울타리 내에서의 신학적 입장도 다양하다. 우리는 서로 왕성한 소통을 하다가도 어느 것 하나에 걸리면 곧장 절교로 돌입한다. 절교의 꺼리가 안되어도 심사가 뒤틀리면 교제의 단절이란 마지막 수단을 쉽게 사용한다. 기분이 좀 상하고 소통에 사소한 삐그덕 징조만 보여도 절교의 칼을 급하게 뽑는 건 종교적 경박이다. 여기에는 대체로 진리의 본질적인 문제이기 이전에 개별적인 성품의 미숙함이 관여하는 듯하다. 진리는 들러리 명분일 뿐이고. 물론 심각한 진리의 문제라면 예외겠다.

고백적 통일성과 신학적 다양성의 조화를 생각하다 나름대로 여문 입장은, 자신을 향해서는 고백의 가장 엄밀한 기준을 적용하고 신학의 날을 가장 예리하게 다듬어야 하겠지만 타인을 향해서는 신학적 원수라 할지라도 용납하고 품고 사랑하고 공존할 수 있는 여백을 마련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다. 모든 개인은 서로 동일하지 않다. 생각도 성품도 성향도 습성도 가치관도 관점도 강조점도 다르다. 그리고 사람들은 거의 변하지 않는다. 변한다면 그건 기적이다. 기적이 일어나긴 하지만 기적에 기대어 관계를 유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가 먼저 본을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본을 보이고 빛을 비추는 소극적인 태도가 불가피해 보인다. 신학이 깊고 높고 넓고 길면 주변이 알아서 진동한다. 타인에게 주장하는 자세는 곤란하다. 오해를 풀어주는 정도의 적극성은 필요하다. 그러나 입장의 차이가 동일해질 때까지 강요하면 결국 교제의 단절로 접어든다. 진리의 본질적인 왜곡과 훼손이 아니라면 신학적 입장의 다양성을 서로 존중하며 공존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곰팡이 조금 폈다고 된장단지 통째로 버리는 극단은 경계하면 좋겠다.

자신에게 결정적인 배신의 카드를 사용할 유다를 다른 제자들과 늘 함께 데리고 다니면서 전대관리 직무까지 맡기신 예수님의 의중이 너무도 궁금하다. 고백적 기준의 하하선과 신학적 다양성의 상한선 설정 문제는 더 복잡하게 되었다. 풀어낼 지혜가 목마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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