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28일 일요일

소자사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마25:40)

1. 권위에 있어서나 부에 있어서 사람들의 의식과 기억의 촘촘한 그물망도 투과하는 존재감 제로의 서글픈 소자들이 어디에나 있다. 그들이 누구인지, 그들에게 무엇을 했는지, 사람들은 알지도 못하고 기억도 외면하는 부류이다. 그런데 마지막 심판대에 이르러 이런 소자들의 존재를 거론하며 그들을 판결의 예상치도 못한 기준으로 삼으시는 주님 앞에서 양과 염소 혹은 택자들과 유기자들  모두는 반전의 놀라운 전율에 휘감기고 말았다. 이 이야기를 듣고 평소 우리의 관심사가 미치지 못하였던 가난하고 소외된 소자에게 잘해야 하겠다는 결심이 생긴다면 대단히 바람직한 현상이다. 그러나 이야기의 저변에 깔린 추론적 교훈도 간과하지 말아야 하겠다.

2. 양이든 염소든 기준을 몰랐다는 것이다. 기준은 주님께 속하였고 당연히 심판도 주님의 몫이라는 말이겠다. 당연히 이야기의 목적이 자신의 노력으로 그 기준에 부합해야 한다는 행위의 촉구를 겨냥한 것은 아니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왕국을 상속하든 영영한 불에 들어가든 그것은 그 기준이 인간에게 제시되고 인간은 피땀을 흘려 그 기준에 도달하는 부합의 여부를 따라 좌우되는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는 뜻으로도 해석된다. 여기서 나는 은혜를 읽는다. 왕국의 상속은 비록 내가 생의 현장에서 '무의식적' 사랑과 섬김의 땀을 흘리는 방식을 취하지만 은혜로 시작하여 은혜로 끝나는 일이어서 의식도 기억도 없이 이루어진 결과이기 때문이다.

3. 양과 염소에게 있어서 행위가 존재에 변경을 가하지는 못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행위가 존재를 견인하지 않고 행위가 존재를 뒤따른다. 그러나 그들이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로도 구분되고 있다는 점에서 존재와 행위의 필연적인 관계도 동일하게 중요한 대목이다. 물론 우리의 가시적인 눈에는 그런 필연성이 관찰되지 않을 수도 있기에 우리가 심판자가 되지는 못한다. 비록 우리가 열매로 나무를 안다지만 우리의 지각은 저마다 다양해서 존재를 판별하는 절대적인 기준의 적합성을 구비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사랑으로 역사하고 행함으로 온전케 된다는 사실을 폐하지는 못한다. 본인이 주님의 양이라고 믿는다면 증거를 보이라는 야고보의 목소리를 경청해야 한다.

4. 주님께서 친히 소자 중의 소자셨다. 한 사람의 꾸며지지 않은 존재의 실체는 소자 앞에서 드러난다. 지극히 작은 소자 앞에서는 인간의 간사한 조작과 가식이 발동되지 않아서다. 인간은 이득의 조짐이 그림자만 스쳐도 짐승의 본성에 가까운 반응으로 외식에 돌입한다. 그러나 배경도 허술하고 자체로도 흠모할 만한 어떠한 것도 없는 소자에게 뭘 건지려고 그런 짓을 하겠는가? 그래서 소자 앞에서는 있는 그대로가 무방비로 노출된다. 우리의 주님께서 바로 그런 소자의 자리로 오르셨다. 그곳은 저주와 수치와 고통과 억울의 십자가다. 동일한 운명의 배에 올랐던 제자조차 싸늘한 배신의 등짝을 돌리고 저주의 과격한 언사까지 내뱉는 인간의 본성이 고스란히 노출된 지점이 그곳이다.

5. 주님께서 우리로 왕국의 문턱을 출입하는 상속자가 되게 하시려고 은혜로 출입의 자격을 우리의 삶 속에 심으시고 계시다는 인상을 풍기는 본문이다. 양들은 주님의 판결을 접하면서 도무지 동의할 수가 없었다. 판결도 낯설었고 판결의 근거도 생소했다. 기억을 구석구석 살펴도 의로운 행위가 자신의 것이라고 동의할 증거가 발견되지 않는다. 은혜는 지나간 자취를 열매로 남기지만 그 열매 안에서는 원인이 발견되지 않도록 역사한다 함이 옳다. 양으로 택하신 것도 은혜지만 의로운 열매의 출처도 은혜이다. 그 은혜는 땅에 어떤 생색의 흔적을 남기지 않으며 믿음의 마음으로 보지 않으면 발견되지 않는 은밀함이 특징이다. 우리 주님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6. 비록 모든 것이 은혜라 할지라도 인간 문맥에서 요구되는 것은 여전히 소자들에 대한 사랑이다. 그러나 본문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사랑은 무의식적 사랑이며 기억에도 남지 않을 정도의 자연스런 사랑이다. 의식을 잔뜩 동원해서 작심하고 억지로 노력해야 겨우 빚어지는 낯설고 인색하고 어거지에 가까운 그런 사랑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렇다고 소자를 사랑하고 섬기는 일을 의식하지 말라거나 노력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최선을 다하되 그런 노력의 의식적 경지를 넘어서는 사랑과 섬김의 예술적 승화를 요구한다. 오른손의 일을 왼손이 모를 정도의 은밀함이 구현될 수 있는 그런 차원 말이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사랑이다. 당연히 은혜와 사랑은 결코 대립되지 않고 합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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