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22일 월요일

칼빈의 이행칭의?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알았도다 (행10:35)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iustificatur homo per fidem, 갈2:16)'는 바울의 이신칭의 교리와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ex operibus iustificatur homo, 약2:25)'는 야고보의 이행칭의 교리가 충돌되는 듯하여 이신칭의 교리의 대표적 주창자인 루터는 야고보의 서신을 지프라기 서신으로 폄하할 정도였다. 칼빈은 바울과 야고보가 이신칭의 교리에 있어서 상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설명하되 바울은 칭의의 원인으로 믿음을 말하였고 야고보는 칭의의 필연적인 증세로서 행위를 말하였기 때문에 강조점의 차이일 뿐이라는 해법을 제시했다.

최근에 이행칭의 교리가 로마 카톨릭의 전유물이 아니라 우리의 종교개혁 선배들도 침묵하지 않고 껴안았던 교리라는 주장이 칼빈 신학교를 방문했다. 낯설었다. 하나님 앞에서의 경건한 행실을 강조한 부분은 수긍할 수 있었으나 그 행위가 칭의에 원인으로 관여할 수 있다는 뉘앙스를 개신교의 원조들도 덩달아 풍겼다는 다소 도발적인 주장은 재고의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마음은 지금도 동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가 궁금했다. 사도행전 10장에 대한 칼빈의 주석이 핵심적인 부분이다.

하지만 칼빈은 주석에서 이 본문에 근거하여 구원의 원인(causam salutis)을 행위의 공로(operum meritis)에 돌리려는 시도를 경계했다. '의(iustitia)'라는 용어를 가지고 마치 우리가 믿음이 아니라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듯이 주장하는 천박한(frivolum) 오류부터 차단하는 태도를 취했다는 말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받으신 고넬료의 구제와 의로운 행위는 성도의 선행(bona sanctorum opera)이며 믿음의 결과(quod neuter potuit consequi nisi fide, Inst. III.ii.32)이지 결코 칭의나 구원의 근원일 수 없다고 진단한다.

물론 칼빈은 야고보서 주석에서 '사람이 믿음만을 가지고는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한다(non iustificatur homo sola fide)'고 하였다. 그러나 여기서의 믿음은 온전한 의미의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말 그대로의 공허한 지식(nuda et inani cognitione Dei)'을 가리킨다. 그리고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iustificatur operibus)'는 말도 하였다. 그러나 그런 언급도 행위의 공로가 의로움의 원인이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열매로 말미암아 그의 의가 인지되고 승인된다(ex pructibus cognoscitur et approbatur eius iustitia)'는 것을 뜻한다고 설명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선행에 자신의 기준을 따라 과도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경향에 맞물려 타인의 행실을 판단할 때에도 하나님이 보시는 기준은 무시된다. 이러한 인간의 성향을 잘 아는 칼빈은 우리의 의로움이 하나님 앞에서의 의여야 하며 행실의 의로움도 하나님의 기준에 입각해야 함을 늘 강조했다. 이런 기준을 고수하는 칼빈은 지극히 심오한 경건의 소유자가 행한 최고의 선행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무익할 것일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초지일관 피력할 수밖에 없었다.

이사야는 모든 열방이 하나님 앞에서는 무와 허무라고 기록한다. 엘리바스 입술로 잘 증거된 것처럼, 욥이 비록 동방에서 가장 큰 사람이라 할지라도 '욥이 의로운들 전능하신 이에게 무슨 기쁨이 있겠으며 그의 행위가 온전한들 전능하신 이에게 무슨 이익이 되겠는가.' 성경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표현조차 아무것도 아닌 우리를 받으시는 은혜와 영광의 완곡한 진술로 봄이 타당하지 않을까도 생각한다. 당연히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존재하고 보존되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일 수밖에 없다고 간주함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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