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30일 화요일

어리석은 변론은 갖다버려!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딤후2:23)

여기서 변론(ζήτησις)은 대화의 문맥에서 무언가를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무언가를 찾고 추구하는 것은 스스로 존재할 수 없고 완전한 존재도 아닌 인간에게 주어진 창조적 본성이다. 변론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하나님도 그의 백성에게 인간의 죄문제에 대해 변론의 판을 벌이라고 하셨으며, 이사야 선지자도 열방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논하자고 제안했다. 바울 자신의 글쓰기도 변론적인 성격이 다분하다. 그러나 바울은 여러 군데에서 변론을 금하라고 권고한다. 그때마다 변론 자체가 아니라 '어리석고 무식하고 무익한' 변론을 버리라고 하였다.

변론이 어리석고 무익하게 되는 이유에 대해, 칼빈은 주석에서 무언가를 추구하는 물음들이 "경건에 아무런 유익이 없기 (nihil ad pietatem conducunt)" 때문이라 하였다. 교황주의 학자들의 신학은 바로 이러한 물음들의 미궁(labyrinthus)일 뿐이라고 말하면서, 그들의 질문이 처음에는 괜찮은 듯하여도 곧장 "지혜의 허탄한 과시(inani sapientiae ostentatione)"로 인해 스스로도 속는 부패의 급속한 질주를 보인단다. 특별히 소르본의 교황주의 학자들을 지목하며, 물음은 있는데 답변의 안식에 도달하지 못하는 자들이라 비꼬았다.

그럼 변론은 언제 허용되나? 설교에서 칼빈은 변론의 물음과 반응이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들을 세우고(à edifier le peuple de Dieu)" "영혼의 구원(salut des ames)"을 지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덕이나 구원과 무관한 변론은 다툼만 일으키니 어리석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겠다. 욥과 친구들의 대화를 보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가 그 내용을 채우기는 하지만 변론의 핏대는 자기의를 향하여 올린다는 사실이 관찰된다. 욥의 재난과 아픔에 겉옷도 찢고 통감의 눈물을 흘리며 재까지 머리에 뿌리던 절친들과 욥 사이의 아름다운 관계를 어리석은 변론은 초라한 자기지식 키재기로 내몰았다.

이런 분위기는 지금도 얼마든지 연출된다. 진리가 드러나는 것보다 내 입장 건드리는 걸 용납하지 못하는 것에 모든 사람들이 보다 민감하기 때문이다. 모든 진리의 최종적인 판결과 유통은 자기 입술의 몫이라는 교만은 죄가 세상에의 출입을 시도한 태초까지 소급된다. 선과 악을 판단하는 일에 하나님과 같아지려 했고 결국 하나님과 같아진 인간의 부패한 본성은 성품이 겸손하고 삶이 자비롭고 입술이 정직한 중에라도 옳고그름 문제에 돌입하면 판단 종결자의 기질을 발동하고 무소불위 판결봉을 휘두른다. 이는 생각이나 의식의 과정을 생략한 즉각적인 반사신경 수준이다.

자신을 괴롭힐 목적으로 복음을 운운하는 논적들에 대해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라면 기뻐하고 기뻐했던 바울의 처신의 빛이 아침의 캄캄한 비구름과 장대비 사이를 비집는다. 그에게서 옮고그름 문제에 관계의 피가 터지도록 어리석은 변론에 매달리는 것 이상으로 생명의 복음 증거에 순교의 피를 토하는 기독인의 자세가 읽어진다. 이는 인생의 근간이 흔들리는 재앙을 댓가로 지불한다 할지라도 자신의 옳음이 '스스로도 헤아리지 못하고 이치까지 가리울 뿐이라'며 무지의 입술을 가린 욥의 변화와도 동일하다. 오늘은 바울과 욥에게서 진정한 겸손을 묵상한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

댓글 남겨 주셔서 감사해요~~ ^^